뜻밖의 생일 선물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구름 위를 향해 서서히 고도를 높여 갈 무렵, 이어폰에서는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사랑, 그리고 결국 파멸에 이르는 운명을 그려 낸 웅장한 음악은 여행을 앞둔 제 마음에 묘한 긴장감과 설렘을 동시에 안겨 주었습니다.
이어 미국 대중음악인 롤란도 맥클린(Rolando McLean)의 《Don't Take Away》가 흘러나왔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을 담은 부드러운 선율은 《돈 조반니》가 남긴 격정의 여운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욕망을 노래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소중한 인연을 지켜 내고 싶은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음악은 묘하게 어우러지며 앞으로 펼쳐질 몽블랑 여정의 첫 페이지를 조용히 열어 주었습니다.
제 호적상 생일은 7월 2일입니다. 실제 생일은 음력 6월 2일이지만,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출생신고를 한 달가량 늦게 하시는 바람에 호적상 생일이 달라졌습니다. 덕분에 저는 평생 두 개의 생일을 기억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시간의 차이가 이번 여행에서 뜻밖의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가 두바이 도착을 30분 정도 남겨 두었을 때였습니다. 원래 제 자리는 가운데 B석이었지만,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고 싶은 마음에 비어 있던 창가 쪽 C석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습니다. 잠시 후 승무원 한 분이 작은 생일 케이크와 손글씨 메모를 들고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원래 앉아 있던 B석에 흑인 여성 승객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두세 번 손짓을 해도 일어나지 않자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저는 손을 들며 말했습니다. "태룡 양.“
승무원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케이크와 메모를 건네주었고, 옆자리 승객들도 미소를 지으며 함께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수만 피트 상공에서 호적상의 생일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작은 케이크 하나였지만 그 감동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승무원이 건네준 따뜻한 배려는 긴 비행의 피로를 단숨에 잊게 만들었습니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작은 마음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기내 모니터에는 'How was your flight today?'라는 만족도 조사 화면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하트 모양과 웃는 얼굴을 눌렀습니다. 비행 서비스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뜻밖의 생일 케이크가 안겨 준 따뜻한 감동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시였습니다.
문득 15년 전 중국어를 배우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세영 씨가 쉬는 시간에 조용히 케이크를 들고 와 축하해 주었던 기억. 그 이후 생일은 제게 특별한 의미 없이 지나가는 하루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비행에서 받은 작은 케이크는 그날 이후 처음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또 하나의 '생일 아닌 생일'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Don't Take Away》의 선율처럼, 이 따뜻한 기억만큼은 제 마음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부다비를 출발해 제네바로 향하는 다음 비행기에서는 13C 좌석을 배정받았습니다. 비즈니스석과 일반석의 경계에 있는 자리여서 공간이 조금 더 넓었습니다. 통로석을 부탁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좋은 자리를 배정받은 덕분에 작은 행운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묘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좋은 자리를 얻었다며 만족하고 있었는데, 뒤를 돌아보니 세 좌석을 혼자 차지한 승객이 편안하게 누워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조금만 더 운이 좋았더라면 나도 저렇게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만족은 순식간에 비교로 바뀌었고, 감사는 어느새 욕심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장자》의 '빈배(虛舟)'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강물 위를 떠내려오는 빈 배와 부딪히면 누구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금세 언성을 높이게 됩니다. 문제는 배가 아니라, 상대를 의식하고 비교하는 내 마음입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 누가 능히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人能虛己以遊世, 其孰能害之)."
돌이켜 보니 저 역시 조금 더 넓은 좌석을 바라보며 스스로 만족을 잃고 있었습니다. 《돈 조반니》가 보여 준 끝없는 욕망처럼, 비교는 만족을 앗아가고 욕심은 행복을 작게 만듭니다. 반대로 마음을 비우는 순간,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도 충분히 감사한 자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번 여행의 첫날, 아직 몽블랑의 설산을 마주하기도 전에 저는 두 가지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이름 모를 승무원이 건네준 따뜻한 생일 케이크였고, 다른 하나는 장자가 일깨워 준 마음을 비우는 지혜였습니다. 사람의 온기와 고전의 가르침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제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몽블랑을 향한 저의 여정은 설산에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푸른 하늘 위에서 이미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샤모니의 점심, 우려를 설렘으로 바꾼 뜻밖의 성찬
푸른 하늘 위에서 뜻밖의 생일 선물을 받은 여정을 뒤로하고, 드디어 몽블랑의 품에 안긴 마을 샤모니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긴 비행의 피로보다 설렘이 앞섰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몽블랑이 건네준 첫인사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한 끼의 점심이었습니다.
그동안 햄버거라고 하면 얇은 빵 사이에 패티와 채소를 넣어 허기를 달래는 평범한 패스트푸드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샤모니에서 만난 햄버거는 제 고정관념을 단번에 깨뜨렸습니다. 두툼한 쇠고기 패티에서는 육즙이 흘러넘쳤고, 깊은 풍미의 치즈와 신선한 토마토, 짭조름한 샤르퀴트리(charcuterie)가 어우러져 하나의 근사한 요리를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빵이었습니다. 겉은 단단하고 고소했지만 속은 놀랄 만큼 부드러워 씹을수록 밀의 향이 입안 가득 퍼졌습니다.
옆자리 외국인들이 맛있게 마시는 맥주를 보고 따라 주문한 한 잔은 이번 점심의 화룡점정이었습니다. 레몬 한 조각이 띄워진 맥주에서는 패션프루트와 만다린을 연상시키는 은은한 과일 향과 꽃향기가 피어올랐고, 묵직한 햄버거의 풍미를 산뜻하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이토록 풍성한 한 끼가 17유로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출국 전 제 마음 한편에는 작은 걱정이 있었습니다. 이번 TMB를 적극 추천했던 지인이 막상 출발을 앞두고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인지 리더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괜한 선입견이 생기면서 여행에 대한 기대감도 조금은 흐려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샤모니에서의 첫 식사는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의 밝은 표정, 거리의 활기, 음식이 주는 만족감까지 모든 것이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타인의 말에 흔들렸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번 여행은 분명 좋은 추억으로 남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은 단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채워 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든든하게 점심을 마친 뒤, 저는 몽블랑의 거대한 설산을 조금 더 가까이 만나기 위해 톱니바퀴 궤도를 오르는 트램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천천히 산허리를 오르는 열차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습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만년설과 빙하, 푸른 침엽수림, 그리고 알프스의 청명한 하늘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이어졌습니다. 정상까지 오르는 여정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몽블랑의 거대한 설산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수천 년의 시간을 품은 만년설은 말없이 서 있었고, 인간의 시간은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 보였습니다.
샤모니 시내로 돌아와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성당 앞 광장을 넓게 감싸고 있는 거대한 유럽피나무였습니다. 하트 모양의 잎을 가진 이 나무는 오래전부터 유럽에서 평화와 치유, 공동체를 상징해 왔다고 합니다. 몽블랑을 찾는 수많은 여행자의 발걸음을 묵묵히 지켜보며 그늘을 내어주는 모습은 마치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 온 수호자 같았습니다.
이어 샤모니 광장에 세워진 몽블랑 초등의 주인공들을 기리는 동상 앞에 섰습니다. 몽블랑 정상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사람은 산악가이드 자크 발마, 그의 곁에는 등정을 적극 후원했던 과학자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가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늘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1786년 인류 최초로 몽블랑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크 발마와 의사 미셸 가브리엘 파카르였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파카르의 공적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발마의 이름만 널리 알려졌습니다. 후대의 연구를 통해 파카르의 일기와 여러 기록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진실이 밝혀졌고, 그는 몽블랑 초등의 공동 주인공으로 역사 속 제자리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저는 기내에서 들었던 《돈 조반니》를 떠올렸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때로는 타인의 공적마저 가로채려 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늦더라도 결국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사실을 몽블랑의 역사가 조용히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광장을 흐르는 아르브강의 힘찬 물줄기는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생명의 흐름이었습니다. 저는 다리 위에 한참을 서서 설산과 강, 그리고 샤모니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남는 것은 눈으로 본 풍경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감동이라는 사실도 함께 느꼈습니다.
어느덧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관광객의 옷을 벗고 다시 마라토너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매달 함께 달리던 클럽의 월례회에 참석할 수 없는 여건이라 오늘만큼은 그 약속을 몽블랑에서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샤모니의 맑은 공기를 가르며 한 시간 남짓 달리는 동안 눈앞에는 아름다운 삶의 풍경이 이어졌습니다. 저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캠핑장의 사람들, 하루를 마무리하며 여유를 즐기는 여행객들,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연인들, 텃밭에서 채소를 수확하는 모녀의 모습까지. 거대한 몽블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평범한 일상은 그 자체로 한 편의 그림이었습니다. 달리는 내내 '행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런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잔잔히 번졌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창문을 여니 저녁노을 속의 몽블랑이 묵묵히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낮의 웅장함과는 또 다른 고요함이 산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달리기로 허기진 배를 과일과 얼큰한 라면으로 채웠습니다. 알프스의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라면 국물이 어우러지는 소박한 저녁은 어느 고급 레스토랑보다 깊은 만족을 안겨 주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샤모니 시내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저녁 햇살이 비치는 거리에는 노천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산책을 즐기는 여행객들, 하루를 마무리하는 여유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습니다. 그 풍경 속을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퇴직 후에도 가고 싶은 나라를, 가고 싶은 계절에 찾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참 큰 행복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는 노후를 특별하게 설계하며 살아온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맡은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왔을 뿐인데, 지금 돌아보니 행복을 지탱해 주는 몇 가지 소중한 기반이 제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입니다. 마라톤을 즐기고 몽블랑의 산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체력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다음은 경제적인 여유입니다. 사치가 아니라 원하는 곳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정도의 여유만으로도 삶은 훨씬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사람입니다. 마라톤과 여러 단체 활동을 통해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함께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입니다. 마지막으로 일입니다. 은퇴 후에도 고전 인문학을 강의하며 배우고 나누는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제 삶에 여전히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행복은 거창한 성공이나 많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고, 떠나고 싶은 곳으로 떠날 수 있으며, 함께할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몽블랑에서의 첫날은 사람의 따뜻한 배려와 장자의 지혜, 예상 밖의 훌륭한 한 끼, 수천 년의 시간을 품은 설산, 샤모니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 그리고 제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 조용한 성찰이 한데 어우러진 하루로 깊이 새겨졌습니다. 몽블랑은 아직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게 선물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