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B 12

몽블랑-마무리

공간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공감은 사람을 잇는다 양태룡(사단법인 이어도지키기국민운동 대표) 오랜 시간 이어졌던 고전 강의를 마치고 성현들의 문장 뒤로 책을 덮은 뒤, 이번에는 자연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고전을 펼쳐 들었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위스를 잇는 투르 드 몽블랑(TMB)의 길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낯선 장소로 떠나는 물리적 이동을 넘어, 대자연을 나침반 삼아 내면의 나를 찾아가는 인문학적 순례였습니다. 여정의 시작에서 마주한 예술 작품들은 인간의 욕망과 사랑, 자유와 책임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던졌고, 그 묵직한 물음에 몽블랑은 현란한 언변 대신 설산과 숲, 호수와 바람, 그리고 장엄한 침묵으로 답을 건넸습니다. 산은 다투지 않았고, 바람은 서두르지 않았으며, 계절은 순서..

TMB 2026.07.17

몽블랑11

몽블랑의 마지막 아침, 경계를 넘고 본성을 묻다몽블랑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아침이 밝았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진 산행도 어느덧 끝자락에 이르렀습니다. 식당에는 여느 때처럼 푸짐한 뷔페가 차려져 있었습니다. 여행의 마지막이라는 아쉬움 때문인지 사람들은 접시를 가득 채웠지만, 저는 잠시 손을 멈추었습니다. 몸이 원하는 만큼만 먹기로 했습니다. 신선한 과일과 요거트, 따뜻한 커피 한 잔이면 충분했습니다.여행에서 절제는 결핍이 아니라 자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앞에 풍요가 넘쳐도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충만하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작은 절제 하나가 하루를 한결 가볍게 시작하게 해주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아침 운동을 하려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길모퉁이에는 남루한 차림의 노부부가..

TMB 2026.07.16

몽블랑10

안개를 지나, 빙하의 속살을 만나다몽블랑이 가르쳐준 넓은 시선과 사람의 온기아르장띠에르 그라소네 산장에서 맞이한 아침은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밤새 산을 감싸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고, 능선마다 스며든 아침 햇살이 새로운 하루를 열고 있었다. 배낭을 정갈하게 꾸려 샤모니 1번 버스에 오른 뒤, 종점인 르 뚜르(Le Tour)에서 곤돌라를 타고 산 위로 향했다. 차창 아래로는 겨울이면 수많은 스키어들이 질주했을 설원이 펼쳐지고, 에메랄드빛 인공호수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잔잔하게 빛났다. 여름과 겨울이 한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품고 있는 풍경이었다.발메 고개를 바라보며 락 블랑(Lac Blanc)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투르 드 몽블랑(TMB)도 어느덧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걸음을 옮..

TMB 2026.07.16

몽블랑9

몽블랑을 바라보다, 사람을 만나다, 맥(脈)을 잇다7월 9일, 아르장띠에르 그라소네 산장을 나서는 아침입니다. 오늘은 블레방과 에귀뒤미디(Aiguille du Midi)를 중심으로 몽블랑을 가장 가까이에서 조망하는 여정입니다. 그러나 산에서는 늘 계획보다 자연의 결정이 앞서기 마련입니다. 자연이 내려놓은 그 길과 시간에 순응할 때, 여행자는 비로소 지도 너머의 더 큰 풍경을 선물 받게 됩니다. 창밖을 깨우는 이름 모를 새들의 맑은 노랫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목장의 말들은 이슬 머금은 풀을 뜯으며 느릿하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알프스의 아침은 인간의 분주함보다 동물의 정직한 생체 시계가 먼저 열어젖히는 법입니다.동네를 가볍게 산책하다 한 가정집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한 여성이 말의 발굽에 ..

TMB 2026.07.16

몽블랑8

잉여가 만든 길, 자연이 들려준 삶의 문법7월 9일, 오늘 예정된 여정은 아르장띠에르 그라소네 산장을 출발해 발므 고개와 포세트 고개, 에귀에뜨 데 포세트 능선을 지나 락 블랑과 플레제르를 거쳐 다시 산장으로 돌아오는 약 8시간의 산행입니다. 투르 드 몽블랑(TMB)의 후반부에 접어든 만큼 발걸음은 한결 차분해졌고,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은 깊어졌습니다. 아침,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니 제법 몰골이 흉했습니다. 며칠째 깎지 않은 거친 수염 때문인지 동행들은 "이제는 수염 좀 깎아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웃으며 답했습니다."자연에 왔으니 자연을 그대로 두어야지요."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문득 거울 속 제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사람 또한..

TMB 2026.07.16

몽블랑7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욕망을 돌아보다7월 7일 화요일, 투르 드 몽블랑(TMB) 제7구간은 이번 여정 가운데 가장 긴 하루였습니다. 퐁테 산장을 출발하여 낭보랑 산장과 발므 산장, 플랑 데 다메를 지나 본옴므 고개를 넘고, 크루아 뒤 본옴므 산장을 거쳐 레샤피유로 내려왔습니다. 이후 버스로 부르생모리스로 이동하여 랑지발 호텔에서 하루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약 16km를 8시간에 걸쳐 걸어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오늘도 알프스는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삶을 성찰할 여러 장면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산장을 나서자 길가에는 야생 블루베리가 탐스럽게 열려 있었습니다. 하나를 따서 입에 넣어 보았습니다. 시중에서 사 먹던 크고 단 블루베리와는 달리 열매는 작았지만, 입 안 가득 퍼지는 새콤하고 강한 산미가 무..

TMB 2026.07.16

몽블랑4

7월 4일 토요일, TMB 제5구간의 여정은 오토즈 호텔에서 버스로 비비오 정류장까지 이동한 뒤, 보나티 산장을 거쳐 엘레나 산장으로 향하는 약 8km의 산행이었습니다. 4시간 30분 남짓한 비교적 짧은 일정이었지만, 알프스가 펼쳐 보인 장엄한 풍광 속에서 그 어느 날보다 깊은 사색을 마주한 하루였습니다. 출발에 앞서 무사한 여정을 기원하기 위해 들른 쿠르마예르의 작은 성당 앞에는 주황빛 능소화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있었습니다. 명예와 영광을 상징하는 동시에 궁녀의 애달픈 기다림을 품은 이 꽃을 바라보며, 조급함을 내려놓고 긴 시간을 견디어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기다림의 가치와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성당 광장 인근에서는 북극 탐험 중 실종된 쿠르마예르 출신의 전설적인 산악 가이드, 펠리..

TMB 2026.07.16

몽블랑 티엠비6

버려진 조각에서 건져 올린 삶의 미학투르 드 몽블랑(TMB) 제6구간은 약 13km의 산길을 6시간에 걸쳐 걷는 일정이었습니다. 레우슈 산장을 출발해 케이블카를 타고 벨뷔에 오른 뒤, 트리코 고개를 넘어 미아주 산장과 트뤽 산장을 거쳐 레콩타민 몽주아의 퐁테 산장에 이르는 코스였습니다.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쉼 없이 이어져 결코 만만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고단했던 것은 몸뿐이었습니다. 마음은 오히려 자연의 품 안에서 사람과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깊은 사유의 시간으로 채워졌습니다.아침 식사 전 산장 주변을 천천히 산책했습니다. 이웃집 마당에는 폐기된 스키와 낡은 목재를 엮어 만든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수명을 다한 물건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여행자들의 쉼터가 된 풍경..

TMB 2026.07.15

몽블랑5

산그림자, 그리고 함께 걷는다는 것7월 5일 일요일, 오늘의 여정은 엘레나 산장을 출발하여 페레 고개(Col Ferret)를 넘고 라풀리를 지나, 버스로 샹페 호수(Lac de Champex)로 이동한 뒤 다시 레우슈 산장으로 향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약 13km를 5시간 30분 동안 걸었지만, 육신이 움직인 시간보다 하루를 가득 채운 사유와 풍경의 잔상이 더욱 길고 깊게 남은 날이었습니다. 새벽을 깨운 미역국과 장자의 소풍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숙소의 공기를 먼저 깨운 것은 뜻밖에도 구수한 미역국 냄새였습니다. 후배의 생일을 맞아 산행대장이 일찍 일어나 직접 끓여낸 미역국이었습니다. 피자와 스파게티가 연속되던 먼 이국땅의 여정 속에서 만난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마음을 ..

TMB 2026.07.14

몽블랑의 고독과 <폭풍의 언덕>의 서늘한 여운

지난 6월 30일, 15주간 이어온 고문진보 강의를 마쳤습니다. 《논어》와 《맹자》, 《장자》를 오가며 인간의 본성과 삶의 지혜를 함께 나누었던 뜨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열기가 채 식기도 전인 7월 1일, 저는 인천공항에서 몽블랑을 향한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강단에서 고전을 이야기하던 시간이 끝나자마자 알프스의 거대한 자연 속으로 들어서는 여정. 마치 책 속에서 배운 삶의 진실을 대자연 앞에서 온몸으로 확인해 보라는 부름처럼 느껴졌습니다. 만년설을 이고 선 몽블랑 산맥의 웅장한 실루엣을 마주하러 가는 길, 좌석 앞 작은 스크린에서는 에머럴드 피넬 감독이 재해석한 영화 《폭풍의 언덕》이 막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브론테의 고전 소설이 가진 애절한 로맨스를 기대했으나, 밀폐된 비행기 객실이라는 공간과 ..

TMB 2026.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