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B

몽블랑10

벽암거사 2026. 7. 16. 16:50

 

안개를 지나, 빙하의 속살을 만나다

몽블랑이 가르쳐준 넓은 시선과 사람의 온기

아르장띠에르 그라소네 산장에서 맞이한 아침은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밤새 산을 감싸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고, 능선마다 스며든 아침 햇살이 새로운 하루를 열고 있었다. 배낭을 정갈하게 꾸려 샤모니 1번 버스에 오른 뒤, 종점인 르 뚜르(Le Tour)에서 곤돌라를 타고 산 위로 향했다. 차창 아래로는 겨울이면 수많은 스키어들이 질주했을 설원이 펼쳐지고, 에메랄드빛 인공호수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잔잔하게 빛났다. 여름과 겨울이 한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품고 있는 풍경이었다.

발메 고개를 바라보며 락 블랑(Lac Blanc)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투르 드 몽블랑(TMB)도 어느덧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이번 여정에서 만났던 세 나라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이탈리아는 깊고 웅장한 계곡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스케일이 인상적이었다. 거대한 암벽과 빙하가 빚어낸 산세는 자연의 위엄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스위스는 끝없이 이어지는 초원과 목가적인 마을이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주었다. 자연과 사람이 가장 조화롭게 공존하는 풍경이었다. 반면 프랑스는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발끝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거친 너덜길이 유난히 많았다. 아름다움은 화려했지만, 그 아름다움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끝없는 인내를 요구하는 길이었다.

그 길을 걸으며 문득 노자의 도덕경첫 구절이 떠올랐다.

"도를 도라 말할 수 있으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할 수 있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우리는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라는 이름에 저마다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만든 국경도, 이름도 알지 못한다. 거친 바위도, 평화로운 초원도, 웅장한 계곡도 그저 자연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이름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붙여놓은 표식일 뿐, 자연의 본질은 언제나 그 이름을 넘어선다. 몽블랑은 그런 사실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동료들과 보조를 맞춰 걷다 보니 긴 다리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급한 오르막과 너덜길, 미끄러운 내리막에서도 긴 보폭으로 성큼성큼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었다. 단순한 신체적 장점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도 보폭이 있다.

 

눈앞의 문제에만 매달리면 작은 돌부리 하나도 거대한 장애물이 된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전체를 바라보면 길은 의외로 단순해진다. 웅덩이에 빠져 있을 때는 진흙밖에 보이지 않지만 언덕 위에 올라서면 돌아가는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대관(大觀)의 시선이다. 높이 오른다는 것은 남보다 우월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서는 일이다. 안목이 넓어질수록 조급함은 줄어들고, 편법보다 정도(正道)를 선택할 여유가 생긴다.

 

락 블랑에 도착하자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몽블랑 최고의 전망대라고 말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수정처럼 맑은 호수는 하늘을 그대로 품고 있었고, 침봉들은 병풍처럼 호수를 감싸고 있었다. 그 뒤로는 유럽 최고봉 몽블랑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건축물을 세운다 해도 자연이 만들어낸 이 거대한 무대에는 미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말없이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침묵 자체가 하나의 명상이었다.

 

그 순간 '대은은 도시에 숨고, 소은은 산골에 숨는다(大隱隱朝市, 小隱隱山林)'는 옛말이 떠올랐다. 깊은 산에서 평온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분주한 도시에서도 오늘 락 블랑에서 느꼈던 이 평온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일 것이다. 결국 은둔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는 사실을 몽블랑은 조용히 일깨워주고 있었다.

락 블랑을 뒤로하고 찾은 몽땅베르(Montenvers)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한때 '얼음의 바다(Mer de Glace)'라 불리던 거대한 빙하는 온난화로 인해 크게 후퇴했고, 회색 암석과 흙더미가 마치 벗겨진 피부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상처 입은 거인의 속살.

사진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충격이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빙하가 인간의 산업화와 기후변화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자연은 말없이 견디고 있었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가장 큰 경고처럼 느껴졌다. 몽블랑은 아름다움만 보여주는 산이 아니라 인간 문명의 책임까지 묻는 거대한 교과서이기도 했다.

샤모니 시내로 내려와 몽블랑이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뒤편으로는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낸 아르브강이 회색 물줄기를 이루며 힘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거친 암릉을 걷던 몸은 따뜻한 음식과 함께 서서히 긴장을 풀어갔다. 자연 속에서의 고단함과 문명이 주는 안락함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열차를 타고 몽블랑 전사면을 따라 달렸다. 차창 밖으로는 며칠 전 땀 흘리며 걸었던 레우슈의 산길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차는 산중의 작은 간이역에 잠시 멈춰 섰다. 단 두 명의 주민이 내렸고, 플랫폼에서는 가족들이 환한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서로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는 평범한 인사는 오히려 웅장한 산보다 더 깊은 울림을 남겼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도 사람은 결국 사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문명의 크기가 행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반기는 마음이 삶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저녁 무렵 샤모니 광장은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선수들과 관중들로 활기가 넘쳤다. 마침 IFSC 클라이밍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고, 우리는 세계 정상급 리드 클라이머인 서채현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관중석에서 우연히 서채현 선수의 어머니를 만났다. 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고 응원하는 모습은 선수보다 더 긴장한 부모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화려한 메달 뒤에는 말없이 응원해 온 가족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닿았다.

서채현 선수가 벽을 오르기 시작하자 우리는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쳤다. 우리의 응원에 주변 외국인 관중들도 하나둘 박수를 보내며 함께 환호했다. 언어도 국적도 달랐지만 최고의 도전을 향한 존경만큼은 모두 같았다. 스포츠는 경쟁을 넘어 사람을 하나로 묶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사실을 그날 밤 샤모니 광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경기의 여운을 안고 저녁 식사를 위해 유명한 케밥집을 찾았다. 갓 구운 빵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좁은 가게 앞에는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피곤이 쌓인 탓에 "다른 식당으로 가자"는 의견과 "조금만 기다리자"는 의견이 잠시 부딪혔다.

갈등(葛藤)은 칡과 등나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감기며 풀기 어려워진 모습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람 사이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서로 틀려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다. 조금만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한 걸음 양보하면 풀리지 않을 갈등은 없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따뜻한 빵과 불향 가득한 고기, 그리고 둥글게 둘러앉아 나눈 웃음은 기다림마저 여행의 추억으로 바꾸어 놓았다. 갈등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함께였기에 더 맛있었던 저녁뿐이었다.

돌아보면 이날의 여정은 안개를 지나 빙하를 만난 하루이면서, 결국 사람을 만난 하루였다. 락 블랑에서는 넓게 바라보는 삶의 안목을 배웠고, 몽땅베르에서는 인간이 자연 앞에 져야 할 책임을 생각했다. 작은 간이역에서는 사람의 온기를, 경기장에서는 국경을 넘어선 연대를, 케밥집에서는 배려가 갈등을 녹이는 힘임을 배웠다.

산은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해 오르게 하지만, 그 길 위에서 사람은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운다. 높이 오를수록 세상은 넓게 보이고, 멀리 바라볼수록 사람은 더 따뜻해진다. 몽블랑은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풍경만을 선물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삶의 자세까지 조용히 일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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