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B

몽블랑8

벽암거사 2026. 7. 16. 16:47

   

잉여가 만든 길, 자연이 들려준 삶의 문법

79, 오늘 예정된 여정은 아르장띠에르 그라소네 산장을 출발해 발므 고개와 포세트 고개, 에귀에뜨 데 포세트 능선을 지나 락 블랑과 플레제르를 거쳐 다시 산장으로 돌아오는 약 8시간의 산행입니다. 투르 드 몽블랑(TMB)의 후반부에 접어든 만큼 발걸음은 한결 차분해졌고,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은 깊어졌습니다.

 

아침,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니 제법 몰골이 흉했습니다. 며칠째 깎지 않은 거친 수염 때문인지 동행들은 "이제는 수염 좀 깎아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자연에 왔으니 자연을 그대로 두어야지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문득 거울 속 제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사람 또한 지나치게 꾸며낸 매끄러움보다 세월과 바람이 남긴 흔적을 담담히 품고 있을 때 더 깊은 이야기를 전하는 법입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아직도 완전히 철든 사람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나이가 들수록 철이 들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여전히 계절을 만나면 마음이 설레고, 이름 모를 꽃과 새를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고, 산 앞에서는 아이처럼 감탄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철부지일까요, 아니면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잃지 않은 삶일까요.

 

우리말에서 '철들다'는 단순히 나이를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때를 알고 분별을 갖춘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철부지'는 아직 그 때를 모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모든 철부지가 미숙한 것은 아닙니다. 계산보다 감탄을 먼저 알고, 효율보다 경이로움을 먼저 느끼는 마음만큼은 오래 간직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동심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분별은 갖추되 감탄은 잃지 않는 사람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호텔 창문을 열자 이름 모를 새들의 맑은 지저귐이 주변 공간을 가득 메웠습니다. 도시와 자연의 경계가 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새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조화롭게 공존하는 풍경. 그것은 알프스가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지켜온 삶의 방식처럼 다가왔습니다.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뒤 오전 730,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길을 나섰습니다.

10분도 걷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길 한가운데 작은 두더지 한 마리가 차에 치여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먹이를 찾아 길을 나섰을 것입니다. 갑자기 어둠을 찢고 나타난 자동차의 강렬한 불빛은 녀석의 시야를 빼앗았을 것이고, 순간 두려움에 얼어붙은 몸은 결국 무정한 바퀴를 피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그 작고 가녀린 생명을 내려다보는데 자꾸만 인간의 삶이 겹쳐 보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눈부신 빛을 마주하곤 합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성공이나 권력일 수도 있고, 감당하기 힘든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 강렬한 빛 앞에서 우리는 눈이 멀어 멈춰 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의 길 위에서 무작정 멈춰 서는 것은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변화를 직시하고, 때로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설 줄 아는 유연함이 우리의 생을 지키는 진정한 지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자연은 길 위에 누워 말없이 그 뼈아픈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얼음이 녹아 흐르는 길을 따라 얼마쯤 걸었을까, '치즈 마을'이라 불리는 작은 목장에 닿았습니다. 이름이 주는 아기자기함과 달리 가게 하나와 몇 채의 투박한 막사가 있을 뿐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조금 더 오르니 소젖을 채취하는 구조물이 있었습니다.

 

소가 차례로 작업대에 올라서면 장비를 이용하여 젖을 짜고, 모인 우유는 집유시설을 거쳐 아래 마을의 가공시설로 내려보내는 구조였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한 존재가 아니라, 오랜 시행착오 끝에 자연과 조화롭게 협력하는 법을 배운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술이란 자연을 억누르는 무기가 아니라, 자연의 위대한 질서를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해 건네는 따뜻한 조력자의 손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태 산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흥미로운 풍경을 만났습니다. 한 화가는 캔버스 앞에 서서 뾰족하게 솟아오른 암봉의 선율을 거친 붓끝으로 담아내고 있었고,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는 젊은 청년이 드론을 띄워 드넓은 산맥의 입체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캔버스 위에 마음의 선을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첨단 렌즈로 바람의 궤적을 담습니다. 표현하는 언어는 달랐지만, 그들의 시선 끝에 머문 것은 결국 산을 향한 깊은 경외와 사랑이었습니다. 삶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면서도 누구는 붓을 들고, 누구는 카메라를 들며, 또 누구는 그저 두 발로 묵묵히 대지를 밟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의 세련됨이 아니라, 제 몫의 삶을 진실하게 살아내려는 저마다의 뜨거운 태도일 것입니다.

 

포세트 고개(2,521m)에 가까워지자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사납게 몰아쳤습니다. 정상의 풍경은 늘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오래 머물기에는 지나치게 위태로운 곳이기도 합니다. 바람은 거칠고, 기온은 가혹하며, 하늘의 표정은 초 단위로 뒤바뀝니다.

인생의 계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보다 그 자리에서 어떻게 품위 있게 내려올 것인가가 언제나 더 중요합니다. 노자가 말했듯 높은 것은 반드시 낮아지고, 가득 찬 것은 결국 기울기 마련입니다. 정상은 영원히 머무는 삶의 터전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지나가는 간이역일 뿐입니다.

 

바람을 등지고 십여 분을 걸어 내려오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멎고 아늑한 온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주는 아늑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늘 저 높은 정상을 동경하며 걷지만, 결국 우리를 숨 쉬게 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나지막한 평지가 품은 다정한 온기입니다.

 

산자락에 자리한 환경센터에 들렀을 때 직원이 커다란 지도를 펼쳐 놓고 몽블랑의 거대한 골격과 지형을 차근차근 짚어 주었습니다. 웅장한 계곡과 험준한 고개, 점처럼 박힌 산장과 파도처럼 굽이치는 능선들이 거대한 퍼즐처럼 하나로 맞춰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낯설고 생소한 프랑스어 지명들은 돌아서면 금세 흩어질지라도, 이 길의 웅장한 윤곽만큼은 가슴 깊이 선명한 지도로 새겨졌습니다.

 

삶의 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흘러가는 일상의 세세한 장면들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어도, 내가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잃지 않는다면 결코 조난당하지 않습니다. 공자가 말한 '군자는 대도를 구하고 소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가르침 또한 지엽적인 것에 흔들리지 않고 삶의 큰 흐름을 읽어내는 혜안을 뜻하는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산길에는 산악자전거를 탄 무리와 여러 차례 마주쳤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길의 왼쪽으로 비켜섰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비켜 지나갔습니다. 좁은 길목에서 마주친 한 라이더는 자전거를 세우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비난할 일도, 얼굴을 붉힐 일도 아니었습니다. 문화란 익숙함이 굳어진 또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나에게 절대적인 상식이 타인에게는 낯선 이국의 규칙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가 한 걸음씩만 비켜선다면 가벼운 춤을 추듯 충돌을 피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행이란 아름다운 풍경을 소유하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쥐고 있던 잣대가 절대적이지 않음을 온몸으로 배우며 내면의 벽을 허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걷다 보니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하나의 질문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이토록 긴 시간을 내어 머나먼 알프스의 품을 걸을 수 있게 되었을까.'

결국 그것은 '잉여(剩餘)'의 은총 덕분이었습니다. 시간의 잉여가 있었고, 경제적 잉여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 거대한 풍경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잉여가 있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 대부분의 인류에게 하루는 생존을 위해 온몸을 던져야 하는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를 버텨내는 일이 삶의 전부였던 시절에는 저 멀리 솟아오른 푸른 산을 찾아 유유자적 걷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눈부신 생산성의 향상 덕분에 비로소 삶의 틈새인 '잉여'를 선물받았습니다. 때로 잉여는 무분별한 소비나 공허한 낭비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인류는 바로 이 여분의 빈틈 덕분에 아름다운 예술을 빚어내고, 존재의 이유를 묻는 철학을 공부하며, 낯선 길로 여행을 떠나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너른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이 태동하는 첫 번째 조건으로 '여가(schole)'를 꼽았습니다. 먹고사는 생존의 단계를 넘어선 빈 시간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인간은 별을 바라보며 존재의 근원을 묻기 시작했고, 그 사색의 틈바구니에서 문명이 피어났습니다. 결국 이 고독하고 아름다운 트레킹도, 길 위에서 길어 올리는 인문학적 사색도 모두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잉여가 건넨 달콤한 열매인 것입니다.

 

산행을 끝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서산의 해가 붉은 숨을 토하며 능선 너머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습니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솟구친 암봉 위로 핏빛 노을이 아련하게 번져갔습니다. 하루의 묵직한 피로를 달래기 위해 아이스크림 하나와 붉은 와인 한 잔을 식탁 위에 올렸습니다.

화려한 만찬도 아니고 요란한 축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깊어가는 알프스의 밤하늘 아래에서 온종일 걸어온 길과 자연이 들려준 수많은 은유를 천천히 음미하기에는 이 소박한 상차림만으로도 차고 넘쳤습니다.

 

몽블랑은 오늘도 아무 말 없이 거대한 품으로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자연은 결코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위대한 존재로 우뚝 서 있으며, 인생의 정상은 오래 머무는 정착지가 아니라 겸손히 지나쳐 가는 간이역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가만히 걸으며 사색할 수 있는 마음의 빈자리, '잉여'의 힘이라는 것을.

 

어쩌면 여행의 진정한 목적지는 우리가 지도 위에 찍어 놓은 종착지가 아니라, 그 길을 걷는 동안 아주 조금씩, 그러나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넓어지는 우리 자신의 내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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