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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랑11

벽암거사 2026. 7. 16. 16:51

 

몽블랑의 마지막 아침, 경계를 넘고 본성을 묻다

몽블랑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아침이 밝았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진 산행도 어느덧 끝자락에 이르렀습니다. 식당에는 여느 때처럼 푸짐한 뷔페가 차려져 있었습니다. 여행의 마지막이라는 아쉬움 때문인지 사람들은 접시를 가득 채웠지만, 저는 잠시 손을 멈추었습니다. 몸이 원하는 만큼만 먹기로 했습니다. 신선한 과일과 요거트, 따뜻한 커피 한 잔이면 충분했습니다.

여행에서 절제는 결핍이 아니라 자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앞에 풍요가 넘쳐도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충만하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작은 절제 하나가 하루를 한결 가볍게 시작하게 해주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아침 운동을 하려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길모퉁이에는 남루한 차림의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요거트 한 컵을 조심스럽게 나누어 먹고 있었습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아 보였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 어떤 만찬보다도 따뜻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저들처럼 서로를 깊이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평생 함께 걸어온 사람에게 익숙함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눈 덮인 몽블랑 정상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 거대한 침묵은 오히려 제 마음을 가장 깊이 들여다보게 만들었습니다.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익숙했던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열차와 곤돌라를 갈아타고 다시 알프스 초원으로 향했습니다. 푸른 목초지에서는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목에 달린 커다란 쇠방울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청아한 소리를 냈습니다. 처음에는 목가적인 풍경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배경음악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문득 다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종소리지만, 하루 종일 그 소리를 귀 곁에서 들어야 하는 소에게도 과연 아름다운 음악일까요.

그 쇠방울은 결국 인간이 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달아 놓은 관리의 도구입니다. 자연 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다른 생명을 길들이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도 인간 중심적 사고를 발견하게 되자, 조금 전까지 아름답게 들리던 종소리는 묵직한 질문으로 바뀌었습니다.

 

두 시간 남짓 산길을 올라 마침내 스위스와 프랑스의 경계인 발메 고개에 도착했습니다.

국경이라지만 철조망도, 검문소도 없었습니다. 작은 표지석 하나가 두 나라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바람은 국적을 알지 못했고, 구름도 국경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경계는 자연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약속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잠시 쉬며 준비해 간 복숭아를 동료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대부분은 서로에게 먼저 권하며 웃음을 나누었지만, 유난히 자신의 몫을 챙기는 데만 마음을 쓰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중용의 첫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하늘이 부여한 것을 본성이라 하고,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며, 그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성현은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향한다고 말씀하셨지만, 현실 속 인간은 늘 그 본성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욕심과 두려움은 사람을 쉽게 이기심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본성이란 타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매일의 선택과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다듬어 가야 하는 삶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산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굵은 빗줄기가 산을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점심은 햄버거를 포장해 창가에 앉아 먹었습니다. 거칠게 구운 패티와 쫄깃한 빵,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산행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주었습니다.

창밖에는 가문비나무 숲이 빗속에 짙은 초록빛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나무는 선명했고, 멀리 있는 숲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번져 갔습니다. 원근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질서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했습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다산 정약용 선생의 어린 시절 시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까운 것이 언제나 큰 것이 아니며, 멀리 있는 것이 작아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도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의 문제에만 사로잡히면 더 크고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때 비로소 전체가 보입니다. 다산은 어린 나이에 이미 삶의 원근법을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녁에는 프랑스 여행의 마지막 만찬으로 에스카르고와 스테이크를 맛보고 와인을 곁들였습니다. 낯선 음식도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하나의 추억이 됩니다. 와인 한 잔에는 몽블랑에서 흘린 땀과 웃음이 함께 녹아 있는 듯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암벽등반 월드컵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예선에 출전한 대한민국의 성한아름 선수를 만나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비록 결승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끝까지 자신의 한계를 향해 도전하는 모습은 결과보다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타국에서 만난 한국 선수에게 건넨 짧은 응원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깊은 연대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경기 도중 바로 앞자리에는 동성 연인이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손을 맞잡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들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과시도 특별함도 없었습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모두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행은 낯선 풍경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제 안에 남아 있던 익숙한 편견까지도 조금씩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것 또한 여행이 제게 준 소중한 선물이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샤모니의 기념품 가게를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전할 티셔츠와 마모트 인형, 냉장고 자석, 와인 몇 병을 가방에 담았습니다. 손에는 작은 선물들이 들려 있었지만, 마음에는 그것보다 훨씬 큰 선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몽블랑은 웅장한 풍경만 남겨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절제와 사랑, 인간의 본성과 욕심, 경계와 공존, 그리고 다름을 존중하는 마음까지 함께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정은 끝났지만, 길 위에서 얻은 질문들은 오래도록 제 삶의 이정표로 남을 것입니다. 몽블랑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산을 오르는 법보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조용히 일깨워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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