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공감은 사람을 잇는다
양태룡(사단법인 이어도지키기국민운동 대표)
오랜 시간 이어졌던 고전 강의를 마치고 성현들의 문장 뒤로 책을 덮은 뒤, 이번에는 자연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고전을 펼쳐 들었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위스를 잇는 투르 드 몽블랑(TMB)의 길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낯선 장소로 떠나는 물리적 이동을 넘어, 대자연을 나침반 삼아 내면의 나를 찾아가는 인문학적 순례였습니다.
여정의 시작에서 마주한 예술 작품들은 인간의 욕망과 사랑, 자유와 책임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던졌고, 그 묵직한 물음에 몽블랑은 현란한 언변 대신 설산과 숲, 호수와 바람, 그리고 장엄한 침묵으로 답을 건넸습니다. 산은 다투지 않았고, 바람은 서두르지 않았으며, 계절은 순서를 지켰습니다. 폭풍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맑은 하늘이 열리듯, 삶의 시련 또한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더욱 맑고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오르막길은 삶의 고단함을 대변했고, 긴 인내 끝에 맞이하는 내리막길은 평온함을 닮아 있었습니다. 정상을 스치는 거센 바람은 정상이란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니라 다시 내려와야 하는 곳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 서자 마음속을 채우던 욕심과 조급함은 조금씩 비워졌고, 그 자리는 자연의 순리와 평온함으로 채워졌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바꿀 때 비로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몽블랑은 말없이 일깨워 주었습니다.
공간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공감은 사람을 잇는다
장소의 이동은 자연스럽게 사람과의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수많은 국경을 넘는 동안 길 위에서 만난 이들의 마음에는 아무런 장벽이 없었습니다. 언어와 국적은 달랐지만 모두가 같은 길을 걷는 순례자였습니다. 좁은 길에서 먼저 비켜서는 배려와 힘겨운 오르막에서 건네는 격려의 눈빛은 어떤 언어보다 깊은 소통이 되었습니다.
같은 장소에 함께 머문다고 관계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땀 흘리고 어려움을 견디며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서로 다른 장소에 있더라도 존중과 신뢰가 있다면 마음은 언제든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여행 중에는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동행에게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한 직언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산길을 걸으며 깊이 돌아보니 문제는 상대보다 제 안에 있었습니다.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판단은 어느새 자기합리화가 되어 있었고,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제 기준이 앞서 있었습니다. 진정한 소통은 상대를 바꾸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성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산길의 오래된 돌탑과 낡은 목장, 비바람을 견뎌 낸 고목이 서로 다른 시간을 품고도 하나의 풍경을 이루듯, 들꽃과 야생 블루베리가 서로 경쟁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산을 아름답게 물들이듯, 사람 또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조화로운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합리성을 내려놓을 때 성찰이 시작된다
이 깨달음은 길 위를 함께 걸어준 동행들의 따뜻한 배려 속에서 더욱 깊어졌습니다. 생일을 맞은 이를 위해 새벽부터 미역국을 끓이던 정성과, 뒤처진 사람의 걸음에 기꺼이 속도를 맞춰 주던 말없는 배려는 험난한 산길을 따뜻한 공동체의 길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자연은 가장 먼저 정상에 오른 사람보다 끝까지 함께 걸어준 사람들의 발걸음을 더 오래 기억하는 듯했습니다. 인생 또한 앞서가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서로의 속도를 존중하며 함께 완주하는 여정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소통은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내 걸음과 고집을 조금 내려놓고 상대의 보폭에 기꺼이 맞추는 작은 배려에서 시작됩니다.
마지막 날, 만년설을 품은 락 블랑에 도착했을 때 몽블랑은 첫날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산이 아니라 그 산을 바라보는 제 자신의 눈과 마음이었습니다. 만년설을 밟겠다는 의욕으로 시작했던 발걸음은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기꺼이 인정하는 겸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몽블랑이 들려준 삶의 한 문장을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장소는 사람을 만나게 하고, 소통은 관계를 완성하며, 성찰은 내면의 나를 찾아가게 한다.“
돌아보면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기 위한 외출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를 만나기 위한 순례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이국의 끝을 향해 떠나는 길이 아니라, 늘 내 안에 있으면서도 미처 마주하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입니다. 그 여정은 세상을 향해 끝없이 뻗어가는 원심력의 길이 아니라, 본래의 나를 향해 돌아오는 구심력의 길이었습니다.
알프스를 걷는 여정은 끝났지만, 대자연이 가르쳐 준 마음의 문법은 이제 일상이라는 또 다른 길 위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저는 새로운 장소에서 세상을 배우고, 사람들과의 따뜻한 소통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 자신의 합리성을 먼저 성찰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공간은 만남을 열어 주고, 공감은 마음을 이어 줍니다.
몽블랑은 제게 산을 오르는 기술보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가르침은 앞으로도 제 삶의 길 위에서 방향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 줄 가장 든든한 나침반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