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그림자, 그리고 함께 걷는다는 것
7월 5일 일요일, 오늘의 여정은 엘레나 산장을 출발하여 페레 고개(Col Ferret)를 넘고 라풀리를 지나, 버스로 샹페 호수(Lac de Champex)로 이동한 뒤 다시 레우슈 산장으로 향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약 13km를 5시간 30분 동안 걸었지만, 육신이 움직인 시간보다 하루를 가득 채운 사유와 풍경의 잔상이 더욱 길고 깊게 남은 날이었습니다.
새벽을 깨운 미역국과 장자의 소풍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숙소의 공기를 먼저 깨운 것은 뜻밖에도 구수한 미역국 냄새였습니다. 후배의 생일을 맞아 산행대장이 일찍 일어나 직접 끓여낸 미역국이었습니다. 피자와 스파게티가 연속되던 먼 이국땅의 여정 속에서 만난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마음을 데우는 온기 그 자체였습니다. 타인에게 축하받기를 기다리기보다, 자신의 생일을 먼저 나누고자 했던 그 마음결이 참으로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문득 '생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도가의 성현 장자(莊子)는 생일을 두고 '하늘이 인간에게 허락한 하루의 선물'이라 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이 땅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대자연이 잠시 세상이라는 무대에 내보낸 여행자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삶은 잠시 다녀오는 소풍이며, 죽음 또한 본래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귀향(歸鄕)일 것입니다.
생일은 그저 나이의 숫자를 더하는 날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얼마나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만히 되짚어보는 날이어야 합니다.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고, 끝없는 욕망에 매이지 않으며, 본래의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새벽의 미역국은 단순한 축하의 음식을 넘어, 하늘이 허락한 생명에 감사함을 표하는 한 그릇의 숭고한 기도와도 같았습니다.
시간의 증언과 페레 고개의 외로움
엘레나 산장을 떠나 페레 고개를 향해 오르던 길에서 한 노년의 트레커를 마주했습니다. 그는 빛바랜 배낭 속에서 소중하게 간직해 온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1982년, 그의 젊은 시절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 속 세상은 온통 순백의 눈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푸른 대지와 거친 바위가 더 많이 드러나 있어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만년설'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흐르는 시간 속으로 사라져가는 과거의 기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 속의 설원은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시간의 축이 자연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한 인간의 찬란했던 청춘이 흘러갔듯, 산을 지키던 눈도 함께 녹아내린 것입니다. 결국 사람도, 거대한 자연도 덧없는 시간 앞에서는 모두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일 뿐이라는 서글픈 깨달음이 스쳤습니다.
페레 고개는 결코 호락호락하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세찬 바람은 연신 몸을 밀쳐냈고, 뚝 떨어진 기온 탓에 배낭 깊숙이 넣어두었던 두툼한 외투를 다시 꺼내 입어야 했습니다. 산줄기가 길게 드리운 어두운 산그림자는 우리보다 앞서 걸으며 길의 적막함을 더했습니다.
그 순간 정호승 시인의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라는 시구가 마음을 스쳤습니다. 산도 외롭고, 그 산이 품은 그림자마저 외롭다면,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은 결코 특별한 결핍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 숨 쉬는 존재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할 자연스러운 숙명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오늘의 산그림자는 우리의 걸음을 방해하려던 것이 아니라, "외로운 것은 비단 너뿐만이 아니다"라며 고요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함께 걷는 길, 대자연이 주는 위로
그러나 거친 자연 속에서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곁에는 보폭을 맞춰 걷는 일행이 있었고, 서로를 격려하는 다정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발밑에는 붉고 노랗고 하얀 야생화들이 세찬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었고, 우리는 웅장한 만년설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순간을 기억에 담기 위해 즐겁게 발걸음을 멈추곤 했습니다.
멀리 야생화 꽃밭에서는 두 마리의 마모트가 통통한 몸을 들썩이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주위를 경계하면서도 먹이를 찾는 데 여념이 없는 모습이 흡사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닮아있었습니다. 그 녀석들은 인간을 과도하게 두려워하지도, 그렇다고 환대하지도 않으며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자연은 이렇듯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가장 눈부신 아름다움을 허락하는 법입니다.
하산 후 버스정류장 근처의 작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마주했습니다. 파스타를 주문했으나 치즈를 듬뿍 얹은 각종 재료가 혼재된 터진 만두같은 음식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짭조름한 맛과 생소한 식감이었지만, 시장함이야말로 최고의 반찬이었기에 접시를 깨끗하게 비워냈습니다. 일행 중 누군가는 입에 맞지 않아 절반도 비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여행지에서 무엇이든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성 또한 삶의 큰 축복이자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몸은 정직했습니다. 며칠 동안 누적된 산행의 피로가 온몸의 근육을 타고 서서히 밀려왔습니다. 몸이 보내는 정직한 신호는 인간의 부질없는 의지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과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은 정신의 오만함보다 먼저 진실을 말해 주곤 합니다. 그러나 그 묵직한 피로감은 목적지를 향해 한 걸음씩 성실하게 나아간 자만이 가슴에 달 수 있는 영광스러운 훈장이기도 했습니다.
샹페 호수의 평화와 인생이라는 트레킹
버스를 타고 이동해 도착한 샹페 호수는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평화로웠습니다. 거대한 만년설을 병풍처럼 두른 호수 위에서 사람들은 유유히 보트를 타고, 수영을 즐기며 따스한 여름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알프스의 웅장함과 거침을 삶 속의 부드러운 휴식으로 품어 안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연을 정복하거나 소유하려 들지 않고 온전히 동반자로서 함께 누리는 성숙한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국인 트레커들과는 짧지만 다정한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저 같은 산을 걷고 있다는 연대감만으로도 국경과 낯설음을 넘어 금세 마음이 통하는 도반(道伴)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나 국적보다, 대자연의 길이 먼저 우리를 하나로 이어 주는 경이로운 순간이었습니다.
하루의 여정이 저물어갈 무렵, 지친 몸 안에서도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은 늘 전체의 보조를 맞추기보다 홀로 저만치 앞서 걸어가곤 했습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후배가 짐짓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선배님은 발걸음은 세상에서 제일 빠른데, 막상 사진을 찍으시는 시간은 가장 늦습니다."
그 정곡을 찌르는 유머에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여행도, 그리고 인생이라는 거대한 여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빨리 걷는다고 해서 반드시 삶의 진리를 먼저 깨닫거나 목적지에 아름답게 도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붙잡고 싶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위해 한 장의 사진을 찍듯 가만히 멈춰 서는 시간이, 정상을 향해 강박적으로 재촉하던 발걸음보다 영혼에 더 오래도록 기억되는 법입니다.
페레 고개의 매서운 바람도, 산그림자가 전한 고독의 무게도, 그리고 샹페 호수가 보여준 아늑한 평화도 결국은 혼자서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함께 걸어줄 이가 있었기에 거친 바람을 견뎌낼 수 있었고, 함께 웃어줄 이가 있었기에 육신의 피로마저 찬란한 추억으로 승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알프스의 거대한 품은 저에게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인생이란 남을 이기고 앞서 나가야 하는 치열한 경쟁의 길 아니라, 서로의 고단한 보폭을 맞추어 가며 함께 완성해 가는 길고도 아름다운 여행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