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선물 -유추프라카치아-
토요일 오전, 중국어 수업을 하는데 누군가가 “잠시 불 좀 끄겠습니다.”하며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책상을 모으고 의자를 밀고 하여 급조식탁을 만들고 생일축하 악보를 돌리는 잠깐의 분주함 끝에 교실입구에서 세영이가 케익을 들고 들어옵니다. 혹시 오늘의 주인공이 ‘나’일까? 하면서 양초를 세어보니 내 나이숫자입니다. 수강생들은 어리둥절하다가 박수를 치면서 축가를 부르고 샴페인을 터뜨리고 케익을 자르면서 분위기를 한껏 고무시켰고 한 방 맞은 듯한 이벤트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이벤트를 연출한 몇몇 사람들과 점심을 같이했습니다.
식사를 하던 중 세영이가 생일선물로 연극관람을 제안합니다. 오후의 약속을 뒤로 하고 그 자리에서 승낙하였지요.
지난 번 예술의 전당에서 본 ‘햄릿’에 대한 답례라고 하네요.
아내와 같이 북촌아트홀로 가는데 잠시 소강상태였던 비는 전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동이로 퍼붓듯 쏟아집니다.
옷과 신발은 흠뻑 젖었습니다.
극장 입구에 도착하니 관객들은 비를 맞으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고 세영이 남자친구가 우리를 반깁니다.
티켓을 받아서 자리를 찾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건너편 공간에 연극배우들의 쉼터 같은 곳이 열려진 문틈 사이로 보입니다. 무명배우들의 쉼터이자 생존의 터전 같은 곳.
저런 공간속에서 제련의 과정을 거쳐 지상의 대형무대, 유명한 극장으로 진출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막이 오르기 전에 한 배우가 나와서 퀴즈와 함께 관람 전 주의사항을 코믹하게 주의시키면서<유추프라카치아>에 대한 소개를 합니다.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면 시들시들하다가 죽어버리는 식물, 꽃말은 ‘너의 사랑이 필요해’라고 하네요. 오늘 공연에 대한 사전지식이나 상식 없이 극장에 왔기에 신선감은 더했습니다. 아니 딱 하나의 힌트는 눈물 없이는 못 본다는 것이었지요.
막이 오르자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거의 코미디물 수준입니다.
‘눈물’과 ‘웃음’ 상반된 주제이기에 내가 잘못 알고 왔는가 의구심이 들고 선입견에 사로잡혀 곁눈질로 아내를 힐끔 훔쳐보니 아내도 입을 다물 줄 모릅니다. 아내도 나처럼 선입견의 오류를 겪나봅니다.

연극의 줄거리는 대략 이랬습니다.
남북전쟁직후 태어난 애니는 부모를 잃고 세상에 버려진 아이로 동생과 함께 보호시설에 수용되어 있습니다. 결핵과 매독에 걸린 환자들 틈바구니에서 동생 지미를 살려달라는 절규를 외면한 채 의사는 간호사와 주사실을 들랑거리는 재미에 빠져 있고 무관심 속에 동생은 싸늘한 주검이 됩니다. 동생의 죽음을 알게 된 애니는 폭력적으로 변하여 간호사의 귀를 뜯어 무는 상태까지 악화됩니다. 귀찮은 존재로 여긴 둘은 애니를 정신병동으로 넘깁니다. 동생을 잃은 애니는 세상에 대한 배신감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접근하는 모두에게 폭력적으로 대항합니다. 하지만 간호사 애니의 끝없는 관심과 배려, 사랑 속에서 치유를 하고 눈을 수술하면서 세상에 개안開眼합니다. 배경화면은 보란 듯이 만개한 꽃으로 장식되면서 마치 천상의 세계로 온 듯한 신선의 경지로 반전시킵니다.
학업을 계속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하면서 자기를 도와준 비밀을 알게 되었고 간호사 애니의 정신을 본받아 세상을 밝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 물이 저를 살렸어요, 그 한 방울의 물이….”
미미한 한 방울의 물과 같은 관심과 사랑이 세상을 밝히는 시초가 된 것입니다. 흔히들 남상濫觴이라고 표현합니다. 잔에 물이 넘치는 것이지요.
순자 자도 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석자강출어민산 기원가이남상昔者江出於珉山 其源可以濫觴
-옛날에 양쯔강은 민산에서 출발하였다. 그 기원은 잔 하나 넘칠 정도였다-’
범람하는 강물도 집채만 한 파도도 그 시류始流는 작은 잔 하나 정도의 옹달샘입니다. 하지만 옹달샘 같은 한 잔의 물이 모이고 모여서 배가 없으면 건널 수 없는 강이 되고 때로는 홍수가 되어 집어삼킬 듯 덤벼들기도 합니다. 부모형제 다 잃고 정신병동에 수용된 애니를 극진히 돌보아 이 사회의 등불로 이끌어 준 간호사 애니 같은 사람이 있기에 이 사회는 그런대로 발전하고 지낼 만합니다. 끈끈한 우정도 끝없는 사랑도 한 방울 물 같은 관심과 배려 속에서 잉태되어 거대하게 세勢를 형성해가는 것입니다. 대형극장에서 유명한 작가나 유명한 작품만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이리저리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명품족 같은 관객도 있지만 지하의 소극장에서 라면 한 그릇으로 끼니 때우며 작품에 몰입하는 무명배우들의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작품을 찾아 감상하고 작은 문화를 즐길 줄 아는 관객이 있기에 양쯔강은 범람하는 것입니다.
| 세영曰 “연극의 반전은 헬렌 켈러의 스승 애니 설리반의 실화여서 좋았어요.” |
올해의 생일은 세영이와 남자친구가 나의 유추프라카치아였습니다. 비록 며칠 당겨서 지낸 생일이지만 아내와 나는 또 추억의 한 페이지를 기록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 넷은 막걸리와 음악에 취해 여흥을 즐기며 행복의 시간에 흠뻑 빠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비는 하염없이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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