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악의 본질
예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의 표현으로 서로가 불편하지 않도록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이다. 공공장소에서는 그 상황에 맞는 예를 지켜야 한다.
헝가리 태생의 연주자 프랑츠 리스트가 러시아 페테스 궁전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던 중 리콜라스 황제가 시종과 무언가 귓속말로 속삭이자 연주를 멈추고 먼 곳을 바라보며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연주를 진행하지 않자 황제가 “왜 연주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연주자는 머리를 숙이고 나서 “황제가 말을 할 때는 연주도 침묵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음악을 연주할 때는 연주자가 주인공이고 그의 행동에 집중해서 경청하는 것이 예다. 황제는 지위를 이용하여 연주자나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공연장의 예를 어긴 것이다. 공연장에서 연주자와 관객은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아무리 큰 감동을 주는 음악이라도 예를 지키지 않을 때는 멈추고 마는 것이다.
설문해자에 예禮를 ‘이행하다. 신에게 제사를 드려 복을 구하는 일이다. 자부는 示와 豊으로 이루어진 회의자다 ’라고 했다. 示는 제단모양이고 豊은 신령에게 바치는 귀한 물건을 담는 제기 그릇의 상형문자다. 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제수용품을 가득 채운 모습이다. 하늘에 희생과 제물을 바치는 행위와 의식을 뜻한다. 신을 섬겨서 복을 받는다는 의미다. 이는 사회일반의 관습과 풍습을 규정하는 규범을 포함하는 형태로 확장되었다. 가족 상호간에는 친애로, 소규모 부락에서는 연장자와 연소자의 사이를 구분 짓는 질서로, 종묘의 제사는 경건하게, 조정에서는 관직의 등급에 따라 범절이 매겨졌다.
성리학을 창시한 주자는 “자연존재의 원리에 따라 마디 짓고 꾸미는 것이며 인간행동의 법칙”이라고 했다. 자연계에는 질서가 있다. 인간이 절대자로부터 복을 받기 위한 행위의식에서 시작하여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상호관계를 규범 짓는 형식 또는 인간행동의 법칙이다.
그러면 공자는 예를 어떻게 보았을까? 인심이 밖으로 드러나 표현되는 행동규범에 의미를 두고 있다. 형식에 치우치는 예를 혐오했다.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묻자 공자가 말한다.
“질문이 좋도다. 예는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상례는 형식을 잘 갖추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낫다.” <팔일편3-4>
꾸밈이 앞서면 사치스럽고 본질만 내세우면 촌스럽다. 꾸밈과 본질의 조화를 강조하고 그런 상태가 되어야 제대로 된 모습이다. 일상에서 예는 물질적 가치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지극한 정성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실속 없이 겉만 그럴 듯하게 꾸미지 않는 것이 좋다.
상례는 슬픔을 나누는 것이니 상주를 위로하는 것이 최상이다. 상가에 가서 희희낙락해도, 슬픔이 너무 심하여 건강에 해를 끼쳐도 안 된다.
예란 본성에 있는 어진 마음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드러난 상태이다. 이는 나의 일방이 아니라 쌍방으로 드러난 상여相與, 즉 더불어 함께하는 마음의 표출이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예는 형식과 내면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적절하다. 인이 내면적 가치라면 예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다. 행동에 있어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점을 찾는 중용의 상태가 예다. 친구사이에 균형을 잃으면 우정에 금이 가고, 조직원 상호간에 균형을 잃으면 관계가 깨지는 것이다.
예기<예운편>에 예는 ‘합당한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떤 예일지라도 합당한 기준에 맞으면 설령 선왕의 관례에 없을지라도 가히 채택할 수 있는 것’ 이라고 했다. 시대나 상황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관계를 원만히 하는 것이 예의 목적이다. 공자의 인식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공자가 말한다.
“삼베로 만든 갓을 쓰는 것이 예법에 맞지만 지금은 명주로 만든 것을 쓴다. 이것이 검소한 것이므로 나는 여러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르겠다. 마루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법에 맞지만 지금은 마루 위에서 절을 한다. 이것은 교만한 것이므로 비록 여러 사람들과 다르더라도 나는 마루 아래서 절하는 법을 따르겠다.” <자한편9-3>
전통적인 예의식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의식행사를 할 때 사회정의를 해치지 않는 경우라면 전통예법이라도 취하지 않을 수 있다. 검소하게 한 것은 예의 본질에 충실 할 것을, 마루 위에서 절하는 것은 교만한 행동이라 겸손한 쪽을 택했다. 누가 공자를 고루하고 비현실적이며 안 되는 것을 시도하려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인격체로 자리매김
잘못이 있으면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지도층이 과오를 저질렀을 때 변명과 둘러치기로 일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공자는 잘못이 있을 때는 곧바로 인정할 줄 알았다.
진나라 사패가 공자에게 묻는다.
“소공은 예를 아십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예를 압니다.” 공자가 물러난 후 사패가 무마기에게 앞으로 나오기를 요청하면서 말했다. “나는 군자는 편당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군자도 편당하는군요. 소공이 오나라에서 부인을 맞았는데 동성이라 오맹자라고 불렀소. 이런 군주가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른단 말이요” 무마기가 공자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공자가 말했다. “구(공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게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나에게 알려주니까”<술이7-30>
공자가 진陳나라를 방문했을 때 사패(법무장관)가 공자를 시험하고 있다. 당시는 같은 성씨 끼리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노나라와 오나라는 조상이 같아 희姬씨의 후예다. 노나라 소공은 부인을 ‘오희’라고 불러야 하나 그런 사실을 숨기려고 ‘오맹자 ’라 불렀다. 사패가 이 사실을 알고 지적하자 공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지도자로서, 올바른 민주시민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과오를 시인하고 반성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시험(검증)은 계속 된다.
| 시와 예를 배우도록 가르치다.5 |
진항이 백어에게 물었다. “당신은 또 다른 말씀을 들은 게 있습니까?” 대답하기를, "아직 없습니다. 한 번은 혼자 서 계실 때에 제가 종종 걸음으로 마당을 지나가는데 '시를 배웠느냐?' 물었습니다. '아직 배우지 못 했습니다'고 대답했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잘 할 수 없다'고 하셔서 시를 배웠습니다. 다른 날 또 혼자서 계실 때에 제가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지나는데 '예를 배웠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고 대답했더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남 앞에 설 수가 없다'고 하셔서 예를 배웠습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항이 물러나와 기뻐하며 말하기를, "한 가지를 물었다가 세 가지를 알게 되었다. 시에 관한 것, 예에 관한 것을 듣고, 군자는 아들을 멀리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계씨편16-13>
진항이 공자가문에서 내려오는 가르침의 비법이 있는가 묻는다. 진항은 위나라 사람으로 자공과 교류하던 사이다. 상인의 시각으로 묻는다. 다른 제자에게는 가르치지 않고 자식에게만 전수하는 비법이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공자는 양심적인 교육자라 별도의 가르침은 없었다.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았다. 역자교지易子敎之, 즉 자식은 서로 바꿔 가르쳐야 한다고 보았다. 자식을 직접 가르치면서 30분이 지나도 손찌검을 하지 않으면 DNA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우스게 소리도 있지 않은가?
공자의 가르침은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고 기회를 평등하게 한 유교무류有敎無類의 가르침이었다.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사회에 진출하여 생활하는데 필요한 교육을 시와 예로 보았다.
시는 순수한 정서를 드러내고 은유적 표현 속에 화자의 의지를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수사법이 뛰어나 대화에서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도 한다. 예는 인간관계에서 처해진 환경(특수성)과 차별성을 고려한 배려가 겉으로 드러나 상호 질서를 유지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시와 예에 더하여 균형과 조화의 과제로 악을 강조한다.
“시를 통해 순수한 감성을 일으키고 예를 통해 도리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되며 음악을 통해 인격을 완성한다.” <태백편8-8>
시란 운율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자연스럽게 사물의 이름이나 언어와 문법을 익히는 것이다. 예는 일을 절차에 맞게 처리하고 처신하여 세상에 나아가는 능력이다. 악은 성정을 기르고 화합하여 타인을 인정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시, 예, 악은 배움의 순서이고 교양인으로서 살기 위한 생활에 필요한 규범이다. 서로간의 조화와 배려에서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인생을 아우르는 큰 줄기이다. 성숙한 삶을 이루는 토대興이며, 그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꾀함立으로써 남과 어울려 살아가는 즐거움의 완성成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6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악경, 춘추-을 비롯한 과거의 전적이 있는 문물을 배우고 예로서 단속하여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유학에서 배움의 종착지는 군자의 완성이다. 배워서 자질을 갖추고 선한 본성仁이 겉으로 드러나는 실천적 행동禮이 뒤따라야 한다. 예를 실천하면서 물욕의 포로가 되어 인색해서는 안 된다.
자공이 매월 초하루에 지내는 곡삭제에서 희생으로 양을 바치는 것을 없애려고 하자, 공자가 말했다. “사(자공)야, 너는 그 양을 아끼지만 나는 그 예를 아낀다.”<팔일편3-17>
천자가 섣달에 다음 년도의 달력을 제후에게 나누어 주면, 제후는 이를 사당에 두고 매월 초하루에 양羊을 희생으로 바치며 세월을 알렸다. 노나라는 문공시절 부터 곡삭의 예를 행하지 않고 양만 바쳤다. 자공이 보기에 양만 희생할 뿐 의미가 없다고 보고 희생양 제도를 없애려 했다. 그러나 공자는 비록 의식 자체는 폐지되었지만 양을 바치는 일이나마 보존하여 전통을 고수하고자 한 것이다.
물질적 가치나 개인의 유, 불리를 따지지 않고 예로서 단속하고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알고 사회는 정화된다.
공자가 말했다. “백성을 정치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형벌만 면하면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서 다스리면 부끄러움도 알고 잘못을 바로잡게 된다.” <위정편2-3>
공자는 법과 형벌의 정치가 가진 모순을 잘 알고 있었다. 법은 질서를 세우고 잘못을 명백하게 가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법망을 피하는 죄까지 가려낼 수는 없다. 아무리 법을 치밀하게 만들어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만 피할 경우 죄의식도 부끄러움도 없다. 흔히 말하는 법꾸라지들은 통제할 방법으로 덕과 예로 다스릴 것을 제시했다. 부끄러움은 사람만이 지닌 특징이다. 스스로 바르게 된다는 점에서 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할 때 비로소 반성하고 바르게 된다. 이것이 덕과 예로 다스리는 사회가 지닌 힘이다. 공자는 다스림의 요체를 덕과 예로서 인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공자가 꿈꾼 대동사회의 모습이 바로 재판이 없는 세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자가 말한다.
“소송사건을 처리하는 일은 나도 남만큼은 할 수 있으나 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안연편12-13>
인류가 생긴 이래 매일 갈등과 분쟁이 발생한다. 특히 요즈음은 학교폭력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문제가 발생하면 피해자, 가해자 모두 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법에 의한 조치는 네가 얼마만큼 잘못했으니 그 잘못에 대한 죗값을 지불하여야 한다는 응보적 성격을 지닌다. 응보적 조치는 처벌을 통해 발생한 만큼 피해를 입혀 균형을 이루겠다는 것인데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처벌로 물질적 보상은 받지만 집단에서 소외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가해자 또한 물질적 보상이나 사회봉사명령 수행 등으로 죗값을 지불했기에 반성은 없다. 서로간의 화해나 치유는 없다. 처벌위주 조치보다는 화해 같은 대안이 필요하다.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초기에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가해자는 반성을 통한 피해자를 치유하고, 피해자는 용서를 통한 가해자와 깨어진 관계를 복원하는 회복적 조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104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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