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고전 강의/논어 교실

덕, 행복사회로 가는 힘2

벽암거사 2025. 8. 31. 10:26

덕망 있는 사람은 말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입에 발린 덕담을 하는 사람은 그 말에 무게가 없다.

사람을 분별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고 그 사람의 눈동자만 보면 거의 90%는 식별이 가능하고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거의 완벽하게 평가할 수 있다. 덕으로 투영되어 나온 말과 말로만 덕이 있는 양 번지러하게 내뱉고 얼굴빛으로 포장해도 다 알 수 있다.

 

왜 덕이 필요한가?

 

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상대방의 말보다는 자신의 말을 중요하게 여겨 남의 말꼬리를 자른다. 교묘한 말재주로 주변 사람을 현혹시킨다. 본심을 덧칠해서 순간순간 눈치를 봐가면서 착하고 어진 사람인양 행동한다. 상대의 마음을 훔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럴듯하게 꾸민 달콤한 말은 덕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다.

공자가 말한다.

 

교묘한 말은 덕을 어지럽히고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그르친다.”<위령공편15-26>

 

교묘하게 꾸며대며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말로 치장하는 사람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말보다는 행동을 관찰하고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해야 한다.

공자가 말한다.

 

"온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두루뭉술한 사람은 덕을 해치는 사람이다."<양화편 17-13>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여 우물쭈물 넘어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사람. 뚜렷한 가치관이 없고 삶의 태도가 진지하지 않은 위선적인 사람. 둘 다 해충 같은 존재다.

겉보기에는 잘못을 찾을 수 없어 바른 사람으로 보이지만 속을 들어다보면 현실에 타협하고 잇속만을 챙기는 기회주의자이다. 이런 사람은 진짜와 혼동하게 만들어 세상을 교란하고 미혹에 빠뜨리는 사이비似而非.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인기에 영합하여 바른길을 가지 못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이들을 가려볼 수 있는 통찰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제나라 경공이 죽었을 때 말 4000필이 있었다. 누구도 덕이 있다고 하지 않았다. 한 필의 말도 가져가지도 못하면서 왜 그렇게 백성들을 착취해서 원성을 샀는가. 백이와 숙제는 왕의 자리도 양보하고 남쪽 오랑캐 나라로 떠남으로서 지금도 그들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덕은 행동의 실천이고 주위를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

공자가 말한다.

 

덕으로 정치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고 모든 별들이 그를 받들며 따르는 것과 같다.” <위정편2-1>

 

북극성은 별의 움직임에 있어서 중심축이며 절대지존이다. 지존은 자신이 가진 권력과 위세를 내세우지 않고 사랑과 배려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높이지 않아도 뭇 별(백성)들이 존경하고 따른다. 천리마가 명마로 지칭되는 것은 힘이 아니라 덕이다. 태어나기를 좋은 씨의 영향도 있지만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서 명마가 된다.

공자가 말한다.

 

천리마는 그 힘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 덕을 일컫는 것이다.” <헌문편14-35>

 

천리마 기는 기주冀州지방에 뛰어난 말이 많이 나와 부르게 되었고, 덕은 말의 부드럽고 착한 품성을 말한다. 천리마가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 준마라서 칭송하는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말 위에 탄 사람을 배려하는 자세 때문이다. 재주나 재능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품성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인재가 될 수 없다. 똑똑한 사람보다는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보다는 내면적 품성이 중요하다.

논어에 등장하는 맹지반과 신정을 비교해 보자. 맹지반은 전투에서 후퇴할 때 뒤에 처져 적을 막고 성문을 닫으려는 순간 겨우 들어왔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말이 느려서 뒤처졌다” <옹야편6-13>고 했다. 반면에 공자가 꿋꿋한 자를 보지 못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신정을 거론한다. 신정은 천하장사처럼 힘이 세서 용사라고 소문이 나 있었고 누구라도 덤빌 테면 덤비라는 자세로 힘자랑을 하고 다녔다. 이 모습을 본 공자가 신정은 욕심만 있지 꿋꿋하지 못하다” <공야장편5-11>고 했다. 진정한 용기와 덕은 겉으로 드러나는 폼(재주, 재능)이 아니라 안으로 축적된 품(품성)을 말한다.

살육과 전쟁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공자는 오직 힘에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덕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켜야 평천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덕으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강요에 의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 앞에 풀처럼 마음속으로 감화되어 순순히 따른다. 조직에서도 강압적이지는 않지만 평범하고 온화하게 방향만 제시하면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리더 같은 모습.

 

계강자가 공자께 정치에 대하여 물었다. “무도한 자를 죽여서 도가 있는 사회를 이룬다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당신이 정치를 하는데 사람을 죽여서 어디에 씁니까? 당신이 선량해지면 백성들도 선량해질 것입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입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눕습니다.” <안연편 12-19>

 

실력자 계강자는 백성을 무력으로 지배하고자 했다. 하지만 공자는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면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인데 굳이 피를 보는 정치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답했다. 계씨의 무도한 정치는 공자로부터 질책을 자주 받았다. 덕은 포용력이고, 사랑이고, 은혜로움이다. 덕을 베풀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생긴다.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서 다스리면 통치의 품격이 있고, 행정적인 제재와 형벌로서 다스리면 부끄러움도 없고 법망만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덕의 원리란 중심에서 방향성을 유지하며 뭇 별들을 끌어들이는 북극성같이 타인의 몸과 마음을 끌어들이는 힘 같은 것이다. 강요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눕는 풀과 같은 것이다. 조직에서 어떤 사람이 의견을 제시하면 마음이 움직여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모습. 덕이란 자신을 낮추고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가치이다.

덕의 원천은 겸손과 배려에서 나온다. 자신을 비우면 주위를 끌어당기는 힘은 배가 된다. 진공청소기를 보라. 이전에는 청소를 할 때 그냥 쓰레받기를 앞에 놓고 빗자루로 쓸어 담았다. 청소기가 발명되고 나서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자신을 비우고 낮춤으로서 주변의 모든 먼지(백성)를 빨려오게 하는 힘(지도력)이 생겼다. 겸손과 배려에서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지도자를 존경하고 신뢰를 근거로 탄력을 받아서 정책이나 법집행을 힘 있게 할 수 있게 된다.

남궁괄이 공자께 물었다.

 

羿는 활을 잘 쏘았고 오는 배를 끌 정도로 힘이 셌는데 모두 제 명에 죽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와 직은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도 천하를 차지했습니다.” 공자가 답하지 않았다. 남궁괄이 밖으로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군자로구나! 저 사람은 덕을 숭상하는구나! 저 사람은!” <헌문편14-6>

 

덕의 힘을 잘 알았던 성왕 우와 재상 직을 찬양하고 있다. 활 잘 쏘는 예나 배를 끌 수 있는 천하장사 오의 폭압적인 힘으로는 백성이 원하는 바를 해결하지 못했다. 물리적인 힘(무력)이 아니라 자기 성찰을 통한 인간적인 매력에 감동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이달이 쓴 <박절요>라는 시에 인심박한 노인과 아이들의 실랑이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웃집 아이가 대추 따러 왔는데

늙은이 문을 나서며 아이를 쫓는구나!

아이 도리어 늙은이 향해 말하기를

내년에 대추 익을 땐 살지도 못할걸요.

 

정감이 넘치는 시골풍경이다. 가을이 되어 대추가 익자, 이웃집 아이가 대추 서리를 하려고 왔다. 늙은이가 그 사실을 알고 막대기를 들고 아이를 쫓아간다. 쫓기던 아이가 대추를 따 먹을 수 없게 되자, 돌아서며 늙은이에 한마디 던진다. “내년에 대추가 익을 때쯤이면 할아버지는 죽고 없을걸요.” 대추알은 힘이다. 노인은 대추알을 이용하여 아이를 휘두르고 있다. 그 당시의 아이들은 군것질 할 것도 없고 대추하나 따 먹으면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다. 대추하나 그저 먹게 해 주면 고마운 할아버지로 칭송 받을 텐데 그만 악담을 듣고 말았다.

오는 사람 밀치지 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람의 정인데 매정한 늙은이가 대추알 지키려고 아이를 쫓다가 악담만 듣고 말았다.

 

덕의 세계로 이끄는 힘

 

정치의 요체는 재화나 물질이 적은 것이 걱정거리가 아니고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가난한 것이 걱정이 아니라 편안하지 않는 것이 근심거리다. 분배를 공정히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면 된다. 그래도 복종하지 않으면 덕을 쌓아서 그들이 따르게 해야 한다.

덕의 세계로 이끌어 나갈 덕목은 어떤 것일까? 자장의 물음에 공자가 제시하는 실천덕목으로 과 신을 주로 하고 의로움으로 옮겨갈 것<안연편12-10>을 주장하였다. ‘은 절대자에 대한 충성의 개념이 아니라 일을 도모하면서 정성을 다하고 전심전력을 다하는 태도를 말한다. ‘은 사람관계에서의 신뢰이다. 약속을 쉽게 하고 파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심사숙고하여 약속하고 중간에 변수가 생기더라도 먼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신뢰의 첫걸음이다. ‘의 실천은 수오지심의 자세이다. 의롭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오죽했으면 를 듣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근심거리라고 했을까. ‘는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올바른 도리를 말한다. 사람다운 사람으로서 눈앞의 이익을 보면 취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하는 결과가 사적인 이익私益인지 공공의 이익公益인지 한 번 더 숙고의 과정을 거치면 답은 자명하다.

선사후득先事後得의 자세다. 임무와 역할이 우선이고 창의적인 업무자세. 임무가 주어졌을 때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조직을 위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자세를 말한다. 이순신 장군처럼 생즉사의 자세로 과업에 임하는 것이다.

중용中庸이다. ‘이란 지리적, 공간적인 중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인 중이다. 가령 백 미터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 출발선상에 정신력을 집중하고 출발신호와 함께 뛰쳐나갈 준비가 된 상태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전력질주를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모습. 지나치거나 모자랄 것 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 중이다.

이란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변화가 몰아치더라도 상황과 여건에 맞게 합리적으로 위치하는 것이다. 양극단의 회피하여 극단적인 것을 배제하고 7정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용이다.

공자는 중용의 덕을 오래도록 간직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고 있다.

 

중용의 덕은 지극하도다. 그런데 백성들 중에 그곳에 오래 머무는 자가 드물어졌구나.” <옹야편6-27>

 

중용의 덕은 도리에 맞고 변하지 않는 실천적 의미가 강조되고 현실에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한마디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다.

문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조직을 무력이 아니라 가르침과 덕성으로 감화시키고 이끌어야 한다.

공자가 말한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학문과 덕을 닦아서 그들을 오게 하고, 이미 왔다면 그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다.” <계씨편16-1>

 

문덕의 핵심은 예와 악이다. 예가 질서유지 측면의 채찍이라면 악은 주변과 화락하고 조화를 이룬 상태다. 당근과 채찍으로 이끌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잘 해 주면 먼 곳에 있는 사람이 몰려오는 것은 자명한 진리다.

 

덕의 실천자

 

어렵고 힘든 덕의 실천자를 보자.

먼저 태백이다. 태백은 고공단보의 아들로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계력의 아들)의 큰아버지다. 아버지가 막내인 계력을 후계자로 삼을 것이라는 뜻을 간파하고 오랑캐의 나라인 오나라로 떠났다. 왕의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덕이란 적어도 왕 자리를 양보하는 겸양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

민자건의 경우다. 당시 실세였던 계씨가 비읍의 읍장이 되기를 원했으나 끝내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 무도한 자와는 정사를 논하기 싫다는 것이다.

백이와 숙제의 사례다. 은나라를 정벌하려는 희발(무왕)에게 살육전쟁을 멈추라고 하였으나 먹혀들지 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굶어 죽었다.

주변에서 권력다툼이 비일비재하다. 일자리로 싸우고 난리를 피우는데 왕의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생명도 마감하는 것을 보면서 덕의 실천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 일인지 짐작이 간다.

덕을 신념화시킨 공자는 어땠을까? 광 땅에서 위기에 처했다. 반란군 양호가 광 땅 주민을 괴롭혔기에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감금했다. 공자는 악행을 저질지 않았기에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어 의연하게 대처했다.

성인이나 덕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본 받기위해서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주변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배려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멀리서 찾아들기 마련이다. 이것이 덕을 쌓은 방법이다.

덕의 실천은 어렵지만 악덕한 길을 가서는 안 된다. 소시민으로서 원수를 무한한 사랑으로 대처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 이상적인 가치를 제시하는 것보다는 실천 가능한 잣대로 임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원한을 은덕으로 갚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러면 은덕은 무엇으로 갚겠느냐? 원한은 원칙과 정의의 잣대로 갚고, 은덕은 은덕으로 갚는 것이다.” <헌문편14-34>

 

양식 있는 시민으로 살기위해서 공자는 원한은 원칙과 정의의 기준에 맞게 처리하고 은덕은 은덕으로 갚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도리라고 보았다. 시시비비와 포폄襃貶을 초월하는 노자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엄격한 잣대로 시시비비를 가려서 칭찬하고 질책하는 과정을 거치라는 현실적인 주문이다.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박애는 필자의 기준으로는 합리적이지도,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보편적인 인정에도 맞지 않다. 그렇다고 부관참시 하듯 원수는 원수로 갚으라는 앙갚음은 원하지 않는다. 원수는 정의의 잣대를 적용하여 처리하고 덕을 베푼 자에게는 더 큰 덕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 정도만 되어도 이웃이 생기고 나를 찾는 이가 생긴다. 시민 한사람 한 사람이 덕을 쌓아서 온정이 사회로 퍼져나가면 평천하의 세계, 평화의 세상이 온다.

권력()을 가진 자가 온갖 전횡을 일삼는 억압과 폭력이 난무한 세상이 되었다. 영화 <기생충>에도 약자끼리의 연대는 없다. 서로 경쟁하고 무시하면서 강자에게 굴신 거린다. 거의 불가능한 신분상승을 목표로 혈투를 벌인다. 돈 못 버는 사람은 인간이 아닌 벌레. 돈이 많은 사람은 우월한 인간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오늘날 자본주의사회는 화폐가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중요한 것은 돈이 아무리 좋아도 생활에 편리를 줄지 모르지만 편안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횡하는 권력도 민심에는 무릎을 꿇는다. 민심을 얻는 것은 결국 덕이다. 덕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 그 길은 마음공부에 있다. 배려와 양보로 상대를 이끌고 상호 존중하는 마음, 다름을 인정하고 배움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을 향한 성찰의 마음, 주변사람들과 함께하는 공감 능력, 사물에 대한 문제의식, 미래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키우는 것이 성숙된 민주시민으로, 나아가 지도자로 살아남는 길이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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