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고전 강의/논어 교실

學, 배움2

벽암거사 2025. 7. 30. 16:36

배움의 방향

 

배우기를 좋아했던 제자는 누구일까? 노나라의 군주 애공과 실력자인 계강자가 제자들 중에 누가 배우기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머뭇거림 없이 단연 안회(안연)를 추천했다. 그는 먹는데 배부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생활하는데 편안한 것을 찾지 않았다. 행동은 민첩하고 말은 신중히 했다. ‘에게 당한 분노를 에게 옮기지 않았으며 잘못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았다. <옹야편6-2>

이 정도 되니까 안회를 칭찬한 것이다. 안회는 학문적 수준이나 인간적 성찰이 공자를 능가한 제자였다. 논어뿐만 아니라 <장자>에도 언급되어 있다.

 

안회가 말했다. “저는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인의를 잊어버렸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좋기는 하지만 아직은 멀었다.”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다. “저는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예악을 잊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좋긴 하지만 아직은 멀었다.”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다. “저는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좌망坐忘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공자가 깜짝 놀라 얼굴빛을 고치면서 말했다. “무엇을 좌망이라 하는가?” 안회가 말했다. “사지백체를 다 버리고, 이목의 감각작용을 물리치고 육체를 떠나 지각작용을 없애서 대통의 세계와 같아졌을 때, 이것을 좌망이라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대통의 세계와 같아지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게 되며, 큰 도의 변화와 함께하면 집착이 없게 되니, 너는 과연 현명하구나. 나는 청컨대 너의 뒤를 따르겠다.”<장자 대종사6>

 

안회는 인의를 잊고, 예악을 잊고, 도와 일체가 되어 좋고 싫어하는 마음의 차별이 없고, 만물의 변화에 참여하여 집착하지 않는 좌망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관념적인 나를 잊어 도의 세계에 진입한 제자. 공자로서는 대견하고 한편 자존심 상하는 대목이다.

배웠다고 하는 것은 꼭 학문적 성취나 글공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자 자하가 인간의 도리를 배우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고 있다.

 

자하가 말했다. “어진 사람을 어질게 여기고 여색을 경시하며, 부모를 섬기되 그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기되 그 몸을 다하며 친구와 사귐에는 말에 믿음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할 것이다.” <학이편1-7>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먼저 익히는 것만으로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사회가 정화되지 않고 비도덕인 행위가 횡행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공공기관과 기업체에서 사람을 선발하는데 인성을 보지 않고 지식만을 평가의 기준을 삼다보니 인간의 내면적인 요소는 배제되었다. 요즘 인기 있는 연예인들이 마음을 추스르기보다는 식색의 욕구를 추구하는 행동을 보노라면 씁쓸한 마음이 들면서 배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보게 된다.

배우는 자는 감정을 절제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본성을 기를 뿐이다. 절에 들어가서 승려가 되려면 비질하고 땔감 구하고 밥 짓는 일부터 배운다고 한다. 배움은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져야 하며 아무리 많이 배워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하고 배운 것을 잊어버릴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자하는 거창한 글공부가 아니라 사람 됨됨이를 먼저 갖추라고 강조했다. 글 외우는 것이나 문장 짓는 것과는 별개이다.

배우는 자는 오직 학문적 성취에 집중할 뿐이다. 배워서 돈이 되겠다, 편히 살겠다는 조건의 충족을 위한 배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번지가 농사짓는 법을 묻자, 공자는 배우는 취지를 이해 못하고 있는 그의 의식을 문제 삼아 소인 취급한다. 결코 농사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 정의, 믿음을 익혀서 자신을 지배하는 군자로서 자질을 갖추라는 것이다.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을 조성해 주면 먼 곳에서 백성들이 몰려온다. 한 끼의 밥을 해결하는 생존기술을 배우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확립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역량을 키우는 기법을 익히라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배울 것인가?

 

공자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 배우는 것은 시기가 중요하다. 먼저, 때에 맞게(timely) 배우는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군인에서 바로 대통령이 되었다. 자리에 대한 내적 성찰이나 뚜렷한 통찰의 과정이 없었다. 퇴임 후 논어를 사사받고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논어를 배웠더라면 정치를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후회했다고 한다. 다음은 때때로(oftenly)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중국 송나라 때 재상 조보趙普는 학력도 가문도 변변치 않았다. 직책을 잘 수행 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냐고 묻자, “논어 반 권으로 정치를 했다고 했다. 의사결정의 순간에 수시로 논어를 펼쳐보고 결심에 참고한 것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역량개발을 위한 평생학습의 도구가 논어인 셈이다.

가평향교에서 진행하는 논어수업에는 여든 살을 넘긴 분들도 동참하고 있다. 평생 공부를 하면서 공자의 핵심사상과 잘못 알려진 유학의 가치를 알고 막연히 숭배하는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즐거움에 빠져 행복하다고 한다.

행복의 만족도를 높이는 비결은 다양한 즐거움을 골고루 누릴 때 가능하다. 행복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쾌락, 새로운 지식탐구를 통한 지적인 희열, 명상을 통한 창조에서 느낄 수 있다. 쾌락은 육체의 즐거움이요, 희열은 정서적 안정감이요, 창조는 성취를 통한 존재감의 확인이다. 이 셋을 다양하게 반복적으로 맛본 사람은 행복도가 높다. 셋 중에 하나에 빠져 있는 사람은 편식증 환자와 같다. 셋을 맛보고 누리려는 사람은 부족한 지식을 채워 견문을 넓히는 학과 독단에 빠지는 위태로움을 막기 위해 사가 균형을 유지토록 해야 한다. 지식의 축적과 마음의 성찰을 위해서 열정이 필요하다.

자신을 위한 배움은 의심나는 것은 계속 물어서 걸리는 것이 없도록 완벽하게 익혀야 한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묻고, 학식이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에게 묻고<태백편8-5> 공자가 태묘에서 예에 대해서 매사에 물었다.<팔일편3-15>

 

태묘에서 예를 묻다1























 

배움에는 실천이 전제되어야 가치가 있다. 평소에 관리된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남에게 좋은 점만 알려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배워서 영혼의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자신의 발밑부터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 잘못이 있으면 즉시 고쳐나가야 한다.

알다는 알에서 파생된 글자이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본질을 알아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사물과 현상의 외피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헤아린다는 의미다. 올바른 앎이란? 자포自抛(앎의 포기)하지 않고 자기自棄(실천의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지향점이 내부로 향하고 있다. 알면서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에는 진정 아는 것, 잘못 아는 것, 아예 모르는 것이 있는데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잘못 아는 것이 문제이다. 편벽된 말을 듣고 행동의 일부를 보고는 안다고 할 수 없다. 모르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스스로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여기서 그의 위대함이 돋보인다. 불완전하기에 완전하도록 노력하는 모습. 안다는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느냐아는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는다면 비어 있는데서 출발하여 나는 양끝을 두들겨서 마침내 밝혀 줄 것이다.”<자한편 9-7>

 

모른다는 것은 배움의 시작이요. 진리탐구의 출발점이다.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은 자신이 체득한 지식, 경험, 가치관, 신념을 통한 단정과 확신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일체의 선입관이나 편견을 버리고 머리를 비운상태에서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론에 도달해야 진리에 이를 수 있다.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지한 에포케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 상태에 이르면 타인이 보이고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사고를 자신의 틀 속에 가두지 않고,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객관성을 과신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자신 뿐 이라고 믿는 사람 문제는 타인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 어떤 사태에 절대명제를 들이대는 사람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양 끝단을 두드려 철저한 검증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교육은 생각이 없는 교육이 되었다. 정해진 답을 외우도록 하고 사고를 틀 속에 가둬버리는 교육. 거기다 일부 방송매체는 지식소매상과 미디어 장사꾼이 결탁한 장이 되었다. 자기편이면 무조건 옳다는 편향된 지껄임으로, 선입관과 편견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수용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축적하여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는 편향적 행태가 된 것이다.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 합리화 시키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로서 확증편향의 함정은 깊고 단단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교육방식에 하브루타가 있다. 이 교육의 핵심은 친구와 짝을 이루어 각자가 배워서 아는 것을 설명하면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깊이 있게 연구하는 과정을 거쳐서 기존에 배운 것을 새롭게 정리하는 방식이다. 알지 못하는(不知) 단계에서 아는 단계로 나아가고(내면화) 아는 단계에서 좋아하는 단계(체득화)를 넘어 즐기는 단계(거듭 새김)에 이르면 제대로 배운 것이다. 그렇다면, 박식한 공자는 누구로부터 배웠을까? 침묵하는 하늘, 사계절의 운행. 생장하는 만물을 보면서 자연과 우주만물의 변화를 알았고 사람, , 경험, 사물 등 일정한 스승이 없이 알고 있는 존재로부터 배웠다.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았고, 멀리는 주공周公을 통해서 주나라의 문물을 배웠고, 가까이는 정나라 자산과 제나라 안영을 역할 모델로 삼았다. 일에는 민첩하고 말은 신중히 하며 인간적인 성숙을 위한 자세로 임했다.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은 신분을 차별하지 않는 기회의 평등교육이었다.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지 않았다.

 

호향 사람들은 태도가 좋지 않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운데 한 아이가 공자를 찾아뵙자 제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나아가는 것은 동의하지만 물러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아이에게 심하게 대하겠느냐? 사람 이 자기를 깨끗이 하고 나아가려 할 때 그의 깨끗한 면을 받아들이지만, 그의 지난 과거까지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술이편 7-29>

 

배우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출신성분이나 과거의 행적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는 철저한 신분사회여서 제자들 중에는 경대부의 아들 맹의자와 남궁경숙, 거리의 깡패 자로, 상인출신 자공, 천민의 자식인 중궁도 있었다. 가르치는 원칙은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예의만 갖추면 가르치지 않은 바가 없었고 수업료도 문제 삼지 않았다.

또한 그의 가르침은 맞춤식 교육이었다. 배우는 과목과 범위 절차에서도 제자별로 차이가 있었다. 소극적인 염유에게는 적극성을 주문하고 과격한 자로에게는 뒤로 한 발 물러나서 천천히 대응하도록 지도했다.

자하처럼 순진무구한 제자와 콧대 높은 자장에게 사람사귀는 방법을 달리하라고 했다.

 

자하의 제자가 자장에게 사람 사귀는 일에 대해서 물었다. 자장이 말했다. “너의 스승은 뭐라고 말하던가?” 자하는 좋은 사람과 사귀고 좋지 못한 사람은 상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장이 말했다.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르구나. 군자는 현명한 사람은 존경하되 보통사람들도 포용하고 선한 사람을 칭찬하되 능력이 없는 사람도 동정한다. 내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사람들을 어찌 포용하지 못하겠는가. 내가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남들도 나를 거부할 것이니 어찌 남을 거부하겠는가?” <자장편19-3>

 

마음이 착하고 순수한 자하에게는 평판이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가려서 사귀라고 했다. 착하고 순수한 사람은 사기꾼이 접근하여 현혹하면 쉽게 넘어간다. 그래서 사람을 가려서 사귀라고 주문했다. 반면에 자장같이 편협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제자에게는 잘났다고 뽐내지 말고 주변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사람을 포용하라고 했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처해진 환경과 여건을 고려하여 동정심을 가지라고 가르쳤다.

 

배우는 순서

 

대동사회의 실현을 위해서 행동적 실천자인 군자. 필요한 덕목으로 공자의 가르침은 문행충신文行忠信<술이편7-25>이다.

의 덕목에는 예, , , , , 6예가 있다. 그 중에서도 시와 예와 악을 강조한다.

공자가 말한다.

 

시를 통하여 순수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예를 통하여 인간의 도리에 맞게 세상에 서며 음악을 통하여 인격을 완성한다.” <태백편8-8>

사양자에게 거문고를 배우다.13



















시에서 학문을 시작하여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무리 짓지 않는 불편부당을 배우고 풍부한 감성을 키우며, 예에서 상호 존중과 질서의식을 배운다. 외부적 상황에 동요되지 않고, 질서를 통해서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하며, 음악에서 성정을 길러서 조화를 이루는 균형감각을 갖추면서 인격자를 완성하는 것이다.

<양화편17-9>에서 시를 배우면 시는 감흥을 나타낼 수 있고, 인정과 풍속을 살필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한데 모일 수도 있고, 위정자를 원망할 수도 있다. 가까이로는 그것을 본받아 임금을 섬기며,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된다.”고 했다. <양화편17-10>에서 시를 배우지 않으면 부닥치는 폐단을 마치 담장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답답한 지경에 이른다.”고 했다. 시는 음악으로 발전한다. 좋은 시는 작곡가들에게 이르면 작품이 되기에 충분하다.

예는 사람을 반듯하게 만든다. 무례하면 생기는 폐단을 알아보자.<태백편8-2>공손하되 지나치면 몸이 수고롭고, 신중하되 지나치면 주눅이 들고, 용감하되 지나치면 난폭해지고, 정직하되 지나치면 야박해진다.”고 했다. ‘공손, 신중, 용감, 정직도 적정한 선에서 유지해야 가치가 빛나고 조화를 이루어야 원만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은 학문의 이룸이요, 인간생활의 조화와 융합을 통한 사람다운 사람의 완성을 말한다. 공자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심취되어 있었다. 제나라에 가서 순임금의 소음악을 듣고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하니 가히 그 집중도와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시에서 학문을 시작하고, 예에서 서로 존중하면서 세상의 질서(긴장)를 바로잡고 악(음악)에서 인심을 화합하여 조화(이완)를 이룬다. 이 과정을 거쳐서 군자가 완성된다. 인간관계망 속에서 기본적으로 지킬 것을 지키는 자는 비록 학교수업이나 책 속의 지식이 없어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을 가졌거나 재력이 있다고 거드름 피우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의 자질을 생각하게 된다.

행동측면을 보자.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보고 오랜 생각 끝에 나름 지식을 축적한다. 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책 속의 지식이나 백면서생적인 문제의식에 머물러서야 되겠는가. 예를 실행에 옮기면 민주시민으로, 시민들과 소통하는 지도자가 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실천의 어려움은 공자도 스스로 시인하고 있다.

 

학문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을지 모르겠다.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는 군자라면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술이편 7-33>

 

공자가 이 말을 가슴깊이 새겼던 모양이다. 배우고 나서 바로 행동의 단계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익힌 후에 체득화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실천에 옮긴다.

다음은 충실이다. 부여된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자기 내면을 닦아 세우는 노력이다. 그릇에 재료인 덩어리를 넣고 온 힘을 다해 가루()가 될 때까지 빻으며 기울이는 노력. 가진 힘을 다 쓰고 부족하여 마음까지 다 썼을 때 충실의 단계에 이른다. 잔에 물이 넘치고 안 넘치는 것은 물 한 방울이 좌우한다. 한 방울을 더하는 노력이다. 성을 쌓는데 한 망태기의 흙을 쌓으면 성이 완성되고 쌓지 않으면 미완성으로 남는다.<자한편9-18>

마지막으로 믿음이다. 신뢰가 말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서 축적된다. 공자가 말썽꾸러기 제자 재야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믿었으나 나중에는 그의 행동을 관찰하게 되었다<공야장5-10>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진 불신의 사례이다.

 

배웠다는 것은 예의염치禮義廉恥가 있어야 한다. 예는 절도 넘치는 행위로 사회질서의 근간이다. 의는 스스로 나아가기를 머뭇거리지 않는 행위로 사사로운 마음을 제압하고 일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염은 잘못을 은폐하지 않는 행위이다. 잘못이 있다면 스스로 고쳐야한다. 치는 그릇된 일을 보면 부끄러워하는 행위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 더 나은 삶을 지향하기 위해 배우는데 중요한 것은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인간적 성찰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양심과 악심이 있다. 니체는 인간 정신을 속박(낙타),자유(사자),향유(아이) 3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는 속박의 단계로 낙타처럼 묵묵히 일만 하는 단계이고 2단계는 사자처럼 행동하는 자유의 단계이다. 3단계는 어린아이의 단계로 앞서 한 행동이나 기억을 잘 잊어버리고 자신의 하는 일을 놀이로 즐긴다. 아무런 계산 없이 웃고 울고 잠자고 배고프면 엄마 젖 먹는 어린아이의 행동은 자연 섭리 그대로이다. 성장을 통해 자연스레 의식이 자라나면서 자기 방식대로 살고자 한다. 잠을 자야 하는데 자지 않고 종일 피곤하다고 한다. 술을 적당히 마셔야 하는데 주사를 부리고 심하면 폭력을 행사한다.

아이의 마음은 첫 번째 마음인 양심良心이다. 어른의 마음은 두 번째 마음(버금 아+마음 심)인 악심惡心이다. 악심이 바로 욕심이다. 첫 번째 마음인 양심대로 살아야 하는데 두 번째 마음인 욕심을 좇다보니 망가지는 것이다. 이 욕심을 다스리는 것을 계- 손으로 창을 들고 지키고 있는 모습-라고 한다. 마음의 경계를 철저히 하고 욕심을 줄이는 방법으로 독서를 권장한다. 1582년 선조가 성균관 학칙을 정비하게 했을 때 율곡은 학칙모범 3조를 독서라고 명시했다. 독서를 경건한 마음을 가지는 심신수양의 매개체로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욕심 채우는 책으로 만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었을 때 행복해질까?

성공을 돈과 직결하여 말하곤 한다. 돈은 행복을 주고 자유를 얻는데 분명 도움이 된다. 돈은 일정액이 지속적으로 들어오면 안정감을 주며 만족을 느낀다. 마음도 평상심을 유지할 때 행복하며 충족 못할 때는 스트레스가 된다. 그럼 어떤 책을 읽어야 할 것인가. 우선 경전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논어, 불경, 성경> 같은 경전은 2000년 이상 읽혀졌으니 검증된 책이다. 경전을 읽으면서 욕심을 경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욕심이 지나치면 죽음을 초래한다. TV에서 방영하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스카이 캐슬>의 경우도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부모의 욕심이 한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한 안타까운 현실. 부모가 자식을 대리만족의 수단으로 삼아버렸다. 아이가 살고자 하는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순간 잠시의 기쁨을 맛보지만 아이는 자살을 선택했다.

그리스 신화 중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부자의 이야기를 더듬어 보자. 너무 높이 날려는 이카로스의 욕심 또한 죽음으로 연결된다. 그렇다고 안주하는 모습도 좋지 않다. 닭이 된 독수리이야기도 있다. 독수리로 태어났지만 닭의 우리에서 병아리들과 어울리다 보니 날개를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바닥의 모이를 쫓으며 살았다는, 독수리가 기질적으로는 충분히 활공할 수 있으나 날기를 시도 하지 않고(의지의 발현이 없음) 안주한 모습이다. 자신의 처지와 역량을 고려한 삶의 설계가 필요하다.

 

심신단련心身鍛鍊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심은 마음이요, 내면이다. 신은 육체이고 외형이다. 요즘에는 배움이 신체적 활동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행동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육체의 배를 채우는 말초적 쾌락을 추구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지적희열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유산소운동을 권하고 싶다. 고전읽기 등 인문학을 익히며 희열을 느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마음운동은 두뇌를 자극하므로 영혼의 개발에 도움이 된다. 명상을 통한 창조의 경지도 있다.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얻어 명상의 단계에 돌입하면 새로운 것을 얻는 창조의 기쁨을 맛 볼 수 있다. 험난한 길이지만 행복도는 높아진다.

 

배우는 자의 자질

 

배우면서 생각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그냥 배우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배움이 내 것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는 배움은 학문의 체계가 없다.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선적, 독단적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할 수 없다. 자기만의 상상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위험에 빠지는 등 문제가 심각해진다. 근거와 논리의 뒷받침이 없이 산 속에 박혀 홀로 지내는 도사처럼 자기만의 오류나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 배움에 생각을 동반하지 않으면 비록 안다고 해도 세상 물정에 어두워 지식을 현실에 적용할 수 없다.

공자가 말한다.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허망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위정편2-15>

 

배움은 생각으로 다져질 때 체계가 서고, 생각은 배움이 뒷받침 될 때 오류와 독단을 벗어날 수 있다. 학자적 문제의식과 기업 경영가적 현상 진단. 이 두 개가 접목되는 지점에서 배움과 생각의 균형이 갖추어 진다.

배우는 자는 안주하는 모습이 아니라 배우는 행위자체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이 여기지 않아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궁금한 것을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고 아울러 인격을 완성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고 의식이 있는 한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 평생 배워야 한다.

공자는 배우는 자의 자질을 4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은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며, 곤경에 처하여 배우는 사람은 또 그 다음이고, 곤경에 처하여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최하이다” <계씨편16-9>

 

최상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천하의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성인을 말한다. 다음은 교육을 통해 바르게 된 사람이며 여기에 공자가 해당된다. 세 번째는 실천하던 중에 곤경에 맞닥뜨려 배우는 사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하수는 곤경에 처하여도 배우지 않는 사람으로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한탄한다. 어떤 경우에도 배우려 하지 않으니 미래가 없다. 배움이 없으면 새나 짐승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추구한다. 고통 없이는 배울 수 없다고 했다. 공자는 배우는 자가 스스로 깨우치려는 의지가 없으면 가르치지 않았다.

 

분발하지 않으면 터주지 않았고 표현하지 못해 괴로워하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았다. 한 모퉁이를 가르쳤는데 나머지 세 모퉁이를 알지 못하면 다시는 가르치지 않았다.” <술이편7-8>

 

의문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발전이 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알게 된 사실을 말로 표현할 듯 말 듯 한 상태에서 문을 두드려준 것이니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상태이다. 배우고 깨우치는 정도를 가슴이 답답한 상태까지 끌어 올리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지 못해 더듬거리는 지경에 이를 때 말문을 열어 주었다. 이후에는 배우고 익힌 것이 부족하다는 마음자세와 배운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임하도록 가르쳤다.

 

배우는 일은 늘 미치지 못한 듯이 하고 오히려 배운 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해야 한다.” <태백편8-17>

 

배움이란 물을 거슬러 울라가는 배와 같아서 열심히 노를 젓지 않으면 퇴보한다. 물이 흐르는 속도 이상으로 노를 저어야만 배가 떠내려가지 않듯 끊임없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공자는 배워서 즐거웠을까?

논어 첫 문장은 배워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이다. 즐거움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즐거워한 증거를 찾아보자. 공자가 제나라에 가서 소음악을 듣고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술이편7-14>고 하였다. 필자는 아무리 즐겁고 좋은 일이 있어도 길어야 하루 이틀이면 기쁘고 좋았던 감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데 공자는 그 좋아하는 고기 맛을 잊었으니 그 심취도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잘 안 된다.

공자는 배우는 즐거움을 만끽했지만 보통 사람들로서는 배움에 있어 즐거움의 단계에 오르는 것이 쉽지 않다. 배우는 행위가 즐겁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남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라는 시험 관문을 통과하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반강제적으로 읽고 듣기를 한 후 외운다. 이후 이해와 체득화의 과정을 거쳐서 내면화를 못한 채 시험이라는 관문을 지나는 순간 반납한다. 자신을 표현하는 단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찾지 못한다. 반면에 체득화한 지식을 글로 쓰거나 말로 표현하는 수업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등 성취의 기쁨을 맛본 사람은 배움의 즐거움을 넘어 지적희열을 느낀다.

 

배움의 최종상태

 

배워서 세상으로 나가야 하므로 더불어 함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실천이 수반되는 본받음과 본질을 꿰뚫는 깨닮음의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배움으로써 자기고집을 내세우지 말고 한 쪽을 좋아하거나 다른 쪽을 미워하는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연찬硏鑽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편견을 버리고 두루 함께하는 실천적인 삶이 공자가 추구하는 도와 일체화 된 완전한 인간이 되는 첩경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결박된 인간 군상은 동굴 속의 세상이 전부인양 잘 못 알고 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편견을 버리고 바깥세상을 맛본 사람의 지각과 경험을 듣고 비교하여 현상을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가진 지식이 절대 진리라고 믿는 편견을 벗어나야 제대로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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