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기
서른다섯이 되던 해, 노나라 소공이 3손씨의 제거작전을 하다가 실패하고 제나라로 떠났다. 이때 공자도 제나라로 가는데 태산을 지나던 중 울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자로로 하여금 자초지종을 알아보게 한 후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가혹한 정치는 호랑이 보다 무섭다.’는 말을 전했다. 가정의 복원이 행복의 시발점으로 생각하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차근차근 이어갔다.
여인은 가혹한 정치(세금) 때문에 공동체 밖으로 밀려났는데 또 다른 복병(호랑이)을 만나서 울고 있었다. 한 가정의 붕괴.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을 어떻게 복원 시킬 것인가? 따뜻한 기운이 도는 가정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부부와 자식, 형제 등 구성원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慈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孝하고 형제간에는 우애悌있는 내리사랑과 치사랑이 공유하는 상호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여기서 공자의 仁(亻+二)사상이 시작되었다.
이제까지의 삶이 막연하게 학문적 성취를 통한 입신양명이었다면 이 사건으로 인해 인류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로 원대한 목표를 설정했다. 이른바 대동사회의 구상이었다. 3대가 호랑이한테 물려갔다는 것은 가정이 파괴된 것이다. 인류의 평화는 하나의 가정이 모이고 모여서 이웃으로 사회로 확장되면서 달성되는 것인데 가정의 붕괴는 불행의 시작인 셈이다.
서른여섯, 제나라 경공이 공자를 만나 정치하는 방법을 묻는다. 제후가 정치를 묻는다는 것은 공자가 국가를 통치할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공자는 경공에게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라고 했다. 자기 위치에서 역할에 충실해라는 의미다. 경공의 집권과정은 이렇다. 당시 제나라 장공은 대부 최저의 처와 불륜의 관계였다. 사실을 알게 된 최저는 장공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장공을 죽이고 정치에는 무관심한 경공을 군주로 내세웠다. 경공은 말에 빠져 있었다. 경공이 관리하는 말이 4천 필이나 되었으니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말 관리에 열중이었던 셈이고 공자는 그 사실을 꼬집어 준 것이다. 물질적 욕구충족에 관심이 많았던 경공.
욕구를 충족하는 삶을 살 것인가? 성장하는 삶을 살 것인가? 욕구는 일시적으로 만족감을 느끼나 지속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같은 행위를 반복했을 때 제자리걸음 수준의 만족도에 머문다. 하지만 성장하는 삶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변화시키면서 개인적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바도 크다.
정치자문의 대가로 경공은 공자에게 벼슬자리를 주려했으나 재상 안영이 반대했다. 법과 원칙에 입각한 행정을 펼치는 안영 입장에서는 유가는 탁상공론식 이론만 내세우지 현실성이 있는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특히 과도한 예에 집착으로 나라예산을 탕진할 소지가 많으니 기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조언했다.
공자는 정치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순임금의 치적을 찬양하는 소韶를 듣고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얼마나 심취되었기에 그렇게 좋아하던 고기 맛을 잊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의 소개서를 ‘분발하면 밥 먹는 것을 잊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으며, 늙음이 닥쳐온다는 사실도 모르는 그런 사람일 뿐’<술이편7-18>’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서른일곱, 제나라 대부로부터 위협을 받고 쫓기다시피 하면서 밥 지으려던 쌀도 씻지 못하고 도망친 사례도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어떤 때는 주나라 문명의 계승자인 자신에게 양호가 어떻게 하겠는가? 광 땅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특유의 배짱으로 버텼던 사례에 비하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마흔의 나이, 어느 덧 공자도 인생의 풍파를 겪으면서 불혹不惑에 접어들었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올바르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뜨거운 감성보다는 냉철한 이성을 굳건히 하고 주위의 꼬임에도 귀가 솔깃해지지 않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링컨은 “나이 마흔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했다. 인생을 책임지고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에 제자 번지가 변혹辨惑-미혹됨을 분별하는 법-을 묻자 공자가 답한다.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신의 몸을 잊고(나쁜 짓을 하여) 그 화가 부모님께 미치게 한다면 미혹됨이 아니겠느냐” <안연편12-21>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었고, 술을 마셔도 양껏 마시지만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또한 사람을 보는 식견이 생겼다. 이 나이 때 쯤 되면 거느리는 식솔도 있고 물질적 욕망도 커져 주변의 유혹에 흔들릴 수 있는 시기이다. 귀가 얇아서 옆에서 누군가 달콤한 말로서 유혹하면 넘어가기 쉬운데 공자는 그 과정을 극복했다.
마흔 둘, 제나라에 피신하여 8년째 유랑하던 노나라 소공이 죽었다. 계손씨가 소공의 동생 송宋을 군주로 내세웠는데 그가 정공이다. 정공은 제후의 자리에 오를 때부터 지지기반이 약했다. 계손씨의 도움으로 군주의 자리에 앉아 허수아비였다. 답답한 마음에 공자에게 신하와 군주의 도리를 묻는다.
정공이 “군주가 신하를 부리는 것과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군주는 예로서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심으로서 군주를 섬깁니다.”<팔일편3-19>
앞뒤 좌우를 살펴봐도 노나라 정공은 3손씨의 세력에 포위되어 있었다. 명목상 군주지만 신하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군주로서 령令은 세워야겠고 꽉 막힌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공자한테 자문을 구한 것이다. 공자는 “직책의 중요성을 알고 의지를 가지고 과업에 대한 열정으로 임하면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일에 대한 열정은 없고 자리보전에 대한 욕심만 가지고 덤벼들면 간신배들의 무리에 갇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자로편13-15>이라고 했다. 이 조언이 적중했던지 훗날(공자나이 52살) 제나라와의 협곡회맹에서 공자를 앞세워 빼앗긴 땅을 돌려받는 공적을 세웠다.
마흔 여섯, 제나라 양공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환공의 묘에서 제자들과 유좌인 의기를 참관하고 중정中正의 도를 논했다. ‘잔이 적당히 차면 균형을 유지하고 잔이 비면 기울어진다. 가득차면 잔이 엎어져 물을 쏟아버리는’ 삶의 지혜를 제자들에게 현장학습을 통해서 가르쳤다.
| 유좌를 보고 도를 논하다.6 |
마흔 일곱, 양호가 실세인 대부 계씨를 가두고 노나라 정권을 좌지우지 하면서 공자를 설득하여 관직에 기용하려고 했다. 이미 공자와 양호의 악연은 열일곱 살 때 있었다. 공자가 양호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리 없다. 양호가 공자에게 선물을 보내지만 공자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답례로 양호가 집을 비운사이 방문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만났지만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았다.
쉰 살, 이제 운명을 알 수 있는 지천명知天命. 가야 할 자리와 가지 말아야 할 자리를 알게 되었고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알았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나이 50에 회심回心했다. 마음을 돌려 먹고 잘못을 뉘우치며 신앙에 눈이 떴다. 마음속에 찬바람이 불면서 왜 사는가? 회한에 빠져 통렬하게 반성-공포와 혐오, 아픔을 느끼지 않고는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없다. 나는 전쟁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간음도 거짓말도 했다. 기만, 절도, 폭행, 살인 등등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악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했다. 천명이든 회심이든 깨달음이나 뉘우침이 있으면 발전하고 성장한다. 나이만 먹고 자기반성이나 성찰의 과정 없이 욕구충족에 머물면 그저 밥만 축내는 밥벌레 일 따름이다.
정치에 참여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공자의 천명이라고 결론짓는다. 하늘의 명령을 헤아릴 수 있는 단계지만 마음은 흔들렸던 모양이다. 앞서 양호가 유혹하였듯이 이제는 공산불요가 손을 내민다. 악의 화신은 항상 천사의 얼굴로 유혹하고 있었다.
공산불요가 비읍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불렀다. 공자가 가려고 하자 자로가 좋아하지 않으며 말했다. “갈 곳이 없으면 그만이지 하필 공산씨에게 가려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나를 부르는 사람이 어찌 헛되이 불렀겠느냐. 만일 나를 쓰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곳을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양화편17-5>
노나라 정공 5년에 권력자 계평자가 죽고 계환자가 대를 이었는데 나이도 어리고 기백이나 능력이 경대부의 자리를 감당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상황을 판단한 공산불요가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초빙했다. 공자는 망설였다. 자신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은 현실에서 도덕정치를 하려면 반란군의 무리를 도와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릴 수 없는 처지라 고민하는 사이에 자로가 발끈하고 나섰다.
벼슬자리를 차지해야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텐데. 답답한 심정에 뗏목을 타고 바다로 갈까? 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다. 떠난다면 자로가 나를 따르리라. 하지만 그는 무소취재無所取材, 뗏목을 만들 재료를 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회의적 결론을 내리고 가슴을 팍팍 치고 있다.
쉰한 살, 인고의 세월 끝에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공직에 등용되어 이상을 펼칠 기회가 왔다. 중도재의 직책을 맡아서 올바른 행정과 법 집행으로 가시적인 업적을 세웠다.
양고기나 돼지고기 파는 자는 값을 부풀리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따로 길을 걷게 되었고 땅에 떨어진 물건은 줍는 사람이 없었다. 밖에서 온 사람은 모두 묵을 곳을 제공하여 관리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사기 공자세가>
이른바 행정시스템이 구축되어 무위無爲의 정치를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셈이다. 당시는 물물교환 형태의 상거래가 확립되어 있었는데 한 사내가 높은 언덕에 올라가 좌우로 바라보면서 시장의 물건을 이리저리 조정하여 큰 이익을 취하는-농단壟斷-행위를 하자 그에게 세금을 매겨 새로운 시장 질서를 확립하였고 성폭력이나 성관련 사고와 도적질하는 행위가 없도록 했다.
| 중도재 임무를 성실히 수행 4 |
쉰두 살, 건설부장관(사공)이 되고 드디어 법무장관(대사구)에 올랐다. 대사구 신분으로 정공을 모시고 제나라 경공과 협곡회담을 하였다. 제나라에서는 공자의 능력을 깔보고 -공구는 예법은 밝지만 용맹은 없다.- 제나라 북쪽 이민족인 래萊를 이용하여 협박했다. 공자는 이미 한 수 앞을 내다보고 경호부대를 대기 시켜놓고 협상하여 운, 환, 구음 지역의 빼앗긴 땅을 돌려받는 업적을 세웠다.
쉰네 살, 타삼도墮三都사건이 발생하였다. 공자는 정공에게 건의해 자로로 하여금 3손씨의 성곽과 군사를 해제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적폐세력의 청산이었다. 처음에는 계손씨. 숙손씨의 성곽을 순조롭게 무장해제 했다. 마지막 맹손씨 성곽을 허물려는 찰나에 공렴처보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공자의 앞길에 탄탄대로의 기대감은 사라지고 외부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제나라에서 미인 80명과 말 120필로 노나라 정공과 계환자를 유혹했다. 공자가 정공에게 “미인과 말을 받지 마라”고 조언하지만 마음은 이미 돌아섰다. 위정자의 추한 모습을 본 자로는 노나라를 떠날 것을 주문했다. 일말의 미련이 남았던지 천자가 제사를 지낸 번육膰肉을 주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했다. 역시 제사고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 번육을 주지 않자 노나라를 떠나다14 |
주유천하기
정치적 좌절을 겪은 공자는 자의반타의반으로 천하주유를 떠났다. 위衛,진陳,조曹,송宋,정鄭,채蔡,초楚나라에 머물렀고 광匡,포蒲,추향楸鄕,협叶 지역을 경유했다. 현재의 산동성과 하남성이다. 산동성의 노나라로부터 서쪽과 북쪽으로 황하를 넘지 않았고 남쪽으로는 장강에 이르지 않아 방원 2천리 정도다. 약 14년간의 여정이다.
쉰다섯 살, 기원전497년(노나라 정공 13년)에 타3도사건 실패로 공자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국을 떠나야 하는 김삿갓 신세가 되었다. 답답한 마음에 주역점을 보았다. 결과는 화산려火山旅괘가 나왔다.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으니 흥興이 다하면 슬픔이 온다고 했던가. 아니 공자의 일생에서 흥의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고 나그네의 설움만 닥친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데 돈도 충분하지 않았다. 다음을 기약할 군주도 없었다. 이미 노나라 동쪽의 강대국인 제나라 경공과는 협곡회맹과 정치적 자문 등 교류가 있었지만 명목상 천하주유여정이지 가진 돈도 사상을 따르는 이도 별로 없었다. 항상 재화財貨와 빗대어 에둘러 묻기를 좋아하던 자공이 공자의 속내를 캐묻는다.
“여기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이를 궤 속에 감춰두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장사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팔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팔아야 지 팔아야 지. 나는 좋은 값을 쳐줄 장사꾼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자한편 9-12>
자신의 몸값을 후하게 쳐 줄 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복지사회를 구현할 책임 있는 자리. 앉아서 기다릴 수 없으니 물건을 들고 찾아 나섰다. 맨 먼저 위나라로 가서 자로의 처남 안탁추의 집에 머물면서 위령공의 정치적 자문에 응했다.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위령공에게 누군가가 공자를 모함하자 대부 공손여가로 하여금 감시토록 했다. 두려운 마음에 10개월 만에 진나라로 가다가 광 땅에서 양호로 오인 받아 5일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이 때 제자들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는데 안연에게 “나는 네가 죽을 줄로 알았다”고 하자 “선생님이 계시는데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 <선진편11-23>라고 답하였다. 신변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공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문왕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의 문화가 나에게 전해져 있지 않는가.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버리려고 했다면 후세의 내가 이 문화를 향유할 수 없었을 것이고, 하늘이 아직 이 문화를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면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찌 하겠느냐" <자한편9-5>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서는 그토록 존경하던 거백옥이 집에 머물렀다. 거백옥의 인품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공자가 거백옥을 평가하기를
“군자로다 거백옥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에 나아가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재능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위령공편15-6>
공자도 이런 거백옥의 행동을 본받아 도가 있으면 벼슬자리에 나가고 도가 없는 세상은 피해서 살기를 원했다. 도가 있는데도 가난하면 수치고 도가 없는데 부유한 것도 수치라고 생각했다. 거백옥의 심부름꾼과 나눈 대화-너의 선생은 무엇 하느냐는 질문에 허물을 적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잘 되지 않는다.-를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수양에 정진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공자가어>에는 ‘겉모습은 너그럽고 마음속은 정직하여 무슨 일이라도 총괄하기를 극진히 하며 자기 몸은 바르게 하지만 남에게는 관대했다. 어진 일을 급급히 하여 착한 일을 하다가 끝을 보는 것은 거백옥의 행실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쉰 여섯, 위나라 영공의 부인 남자南子가 공자를 만나자고 요청하여 만났다. 남자는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인이었다. 갈포로 만든 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났으니 한쪽에서는 유혹의 손짓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관직에 등용되어 꿈을 펼칠 기회를 엿본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자로가 씩씩거리며 항의하자 결코 아무 일이 없었다고 외친다.
공자가 남자를 만나자 자로가 좋아하지 않았다. 공자가 맹세하며 말했다. “내가 만약 떳떳하지 못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미워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미워해!” <옹야편6-26>
단지 등용의 기회를 탐색하였을 뿐 남녀관계가 아니었다는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쉰 아홉, 여름에 위영공이 죽자 왕위계승문제로 정세가 불안했다. 위나라를 떠나 진晉나라 조간자에 의탁하려 했으나 조간자가 현인인 두명독과 순화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위나라로 되돌아왔다가 다시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로 떠났다.
| 서하에서 수레를 돌리다.11 |
송나라의 사마인 환퇴가 나무를 쓰러뜨려 죽이려고 했다. 이런 환퇴의 행동에 담대하게 처신하고 있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부여했는데 환퇴가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술이편7-23>
환퇴는 공자의 제자인 사마우의 형이다. 동생인 우는 그런대로 배우려는 의지가 있었고 행실이 착했지만 그의 형은 포악했다. 위험을 피해 정나라로 갔다. 환영을 받지 못하자 진陳나라로 갔다.
예순 살, 귀가 순해져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게 된다는 이순耳順이다. 고난의 행군은 계속되어 집 잃은 개만도 못한 신세가 되기도 하고 죽음의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공자가 정나라에 갔을 때 제자들과 서로 흩어져 홀로 외성 동문에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이 자공에게 말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데 이마는 요임금을 닮았고, 목은 고요와 비슷하며, 어깨는 자산과 비슷하나 허리 아래는 우임금보다 3치가 짧다. 몹시 지친 것이 집 잃은 개喪家之狗와 같다.” 고 했다. 자공이 이 사실을 공자께 전하자 웃으며 말했다. “외모는 꼭 그렇지 않지만 집 잃은 개라고, 맞구나 정말 맞구나.”<사기 공자세가>
수난은 계속되어 3번째 위기를 맞이했다. 진陳나라에서 3년 정도 머문 뒤 다시 위나라로 돌아가려고 포蒲땅을 지나는데 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한 달 가량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공자가 주유천하하면서 세상을 잘 다스려보겠다는 의지와 그의 담대성은 확인이 되었고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복안은 염유와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공자가 위나라로 갈 때 염유가 수레를 모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공자가 “백성들이 많구나!” 고 외쳤다. 백성들을 다스릴 기회를 나에게 준다면? 하는 희망의 표현처럼 들린다. 염유가 묻는다. “이미 백성이 많으면庶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공자의 답은 “백성을 부유富하게 하고 나서 가르칠敎 것”<자로편13-9>을 제시한다.
공자를 모르는 사람은 관념적이고 이상적이라 표현하지만 이 구절을 읽으면 공자가 얼마나 실용적이고 현실적인가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백성을 풍족하게 해 주는 것이 급선무다. 백성이 풍족해지고 난 후에 가르치라는 것이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은 떠난다. 이는 관중이 주장한 ‘예의염치’와 통한다. 나라를 세우는 요체는 예의염치를 아는데 있고, 예의염치의 시발점은 백성들의 창고를 넉넉히 채워주는 것에서 출발한다. 배를 채우고 난 후에 예를 찾고 가르치라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예만 익혀도 공자는 이미 배웠다고 보았다.
예순 셋, 주유천하의 길에 나설 때 그랬듯이 이래저래 머리는 무겁고 답답하다. 유랑길은 숱한 위험과 비난뿐이다. 오나라가 진陳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가 진나라를 도왔다. 진나라도 상황이 녹록치 않자 채나라로 가려 했으나 부함에서 전쟁에 휘말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진나라에서 채나라로 가던 중 양식이 떨어지고 급기야 7일간이나 굶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4번째 수난인 셈이다.
진나라에 있을 때 양식이 떨어져서 따라간 사람들이 배를 주리는 바람에 일어나지 못했다. 자로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곤궁한 경우를 당하게 되면 잘 견디어지만 소인은 곤궁해 지면 넘치게 된다.” <위령공편 15-2>

끼니를 걸러다보니 병이 생겨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제자도 생겼다. 맏형격인 자로가 총대를 메고 씩씩거리며 덤비듯 말한다. “군자도 궁할 수 있느냐”고. 공자한테 가르침을 받아왔건만 본성은 곤란한 경우에 나타난다. 선생님을 믿고 따랐는데 호강은커녕 배가 고파 죽겠다는 투덜거림에 공자의 진면목이 보인다. “군자는 곤궁에 처하면 더욱 단단해지고 의지를 굳건히 하는 법이다. 소인은 곤궁에 처하면 남의 집 담을 넘는 등 못된 짓으로 순간을 모면하려든다”고 일침을 가했다. 씩씩거리던 자로는 자신의 경솔함과 수양이 덜 된 탓에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곤궁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자공을 활용한다. 자공을 초나라에 보냈다. 소왕이 공자를 맞이하고서야 곤란한 지경을 면할 수 있었다.
자신의 포부를 펼치기 위해 주유천하한지도 8년이 되었는데 어느 곳 하나 발붙일 곳이 없어 한탄한다.
무소도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시경>
공자학당이 내부적으로 탄식하는 시간-공자는 제자들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에도 공자는 제자들과 돌파구를 찾기 위해 토론을 벌인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우리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자로가 “우리가 아직 인仁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롭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그럴 리가! 유야, 인을 실천하는 사람이 반드시 믿음을 얻는다면 백이伯夷나 숙제叔齊같은 사람이 나왔겠느냐? 지혜로운 사람이 반드시 통한다면 어째서 왕자 비간比干같은 사람이 생겼겠느냐?”
다음은 자공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가 선생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눈높이를 조금 낮추시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했다.
공자는 “사賜(자공)야, 농사를 잘 짓는 농부라 해도 많은 수확을 거두는 것이 아니고, 장인이 뛰어난 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에 쏙 들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군자가 자신의 도를 닦아서 잘 갖추어 놓았다고 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너는 도를 닦지 않고 받아들여지기만을 원하는구나. 사야, 네 뜻하는 바가 그렇게 멀지 못해서야!” 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안회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가 선생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그것을 계속 밀고나가 실행하신다면 받아들여지지 못한들 무슨 걱정입니까? 받아들여지지 못한 다음에야 비로소 군자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지 않은 것은 나의 부끄러움이지만, 도를 크게 닦아 놓았는데도 쓰이지 못하는 것은 나라의 부끄러움입니다.”라고 답했다. 공자가 웃으면서 “네가 있었구나, 안씨 집의 아들이여! 내게 재산이 많다면 내가 그를 다스려 줄 텐데” 라고 했다.
인의 실천과 지혜를 갖추고 도를 추구하기 위한 노력과 유자儒者로서 수양이 급선무다. 자질을 갖추지 않고 쓰이기를 바라는 것은 불량벽돌을 가지고 집짓기를 시도하는 것과 같다.
예순 넷, 부함負函에서 다시 위나라로 들어갔다. 공자 일행이 섭葉을 떠나 채蔡나라로 가다가 밭을 갈고 있는 은자隱者 장저와 걸익을 만났다. 공자가 자로를 시켜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게 했다. 은자들의 답은 천하에 혼탁한 물이 도도하게 흐르는데 누구와 함께 그것을 뒤바꾼단 말인가. 당신은 사람을 피하는 공자를 따르느니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우리 같은 사람을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공자는 실망했다. 내가 백성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도 세상을 바꾸려하지 않을 것이다.<미자편18-6>
공자는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 것을 선택한 실천가다. 이것이 2500년이 지난 현 시대의 사람들이 은자가 아닌 공자를 선택한 이유다. 공자가 은자를 만난 이야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사지를 부지런히 놀리지 않고 오곡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무슨 선생이냐’<미자편18-7>는 비난과 초楚나라의 미치광이 접여接輿의 이야기<미자편18-5>도 있다.
유랑하는 동안 만난 은자들의 공자에 대한 평가가 매우 부정적이었다. 논어 <헌문편14-38>을 보면 자로가 석문이란 곳에 묵게 되었는데 새벽에 문지기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자로가 “공자의 제자”라고 대답하자 문지기가 “아! 그 안 될 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 말이오?”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공자의 이상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지만 공자는 끝까지 자신의 이상을 고수하여 결코 나루터-이상세계인 대동사회-를 건너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도가와 유가는 대척점에 서 있다. 공자는 장저나 걸익 같은 은자들과 삶의 방식이 달랐다. 은자들은 도가 없는 현실을 피해서 살면 오염되지 않고 고고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공자는 세상이 아무리 탁류 속에 뒤범벅이 되어도 결코 그 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새나 짐승 같은 무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 속에는 눈을 감는 그날까지 사람 사는 세상에 평화의 온기를 불어넣겠다는 다짐이 들어있다.
예순 다섯, 외모가 비슷하게 생긴 제자 유약有若이 오나라의 공격을 격퇴하고 공을 세운 바 있다.
예순 여덟, 염구가 제나라의 공격을 격퇴하고 크게 승리했다. 계강자가 염구에게 “병법을 어디서 익혔느냐”고 묻자 “공자한테 배웠다”고 말했다. 공자는 병법에도 능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계강자가 공자를 초빙하자 천하주유를 마감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후학양성과 저술 작업에 매진했다.
노년기
예순 아홉, 주유천하를 하면서 올바른 군주를 만나지 못하고 귀국하니 이제 그의 삶도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다. 아들 리(백어)가 죽었다. 아들에 대한 일화는 별로 없다. 자식은 바꿔서 키워야 한다는 교육원칙-역자교지易子敎之-을 지킨 모양이다.
진항(진성자)이 제나라 간공을 살해했다. 공자가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판단하여 노나라 애공에게 토벌하자고 건의했다. 애공은 무력한 자신의 처지를 알았기에 3손씨에게 물어보라고 우물쩍 넘긴다. 3손씨의 전횡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세력이 가장 센 계씨가 전유의 땅을 넘보자 자로와 염구로 하여금 말리라고 했다. 두 제자도 어쩔 수 없다고 꼬리를 내린다. 이 과정에서 사유재산의 많음보다는 분배의 공정성과 안정적인 삶에 방점을 두라고 조언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재물이 적은寡 것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고르
均지 못한 것을 근심하고, 가난貧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
安하지 못한 것을 근심해야 한다. ” <계씨편16-1>
물질적 풍요만큼 재화를 분배하는데 있어서 공정성이 중요하다. 공정하지 못한 잣대로 정사를 하면 시민들은 분노한다. 한편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문제다. 자존감이 무너지면 존재의 가치가 없다. 자존감은 자신의 실적과 스펙과 무관하다. 결과보다 과정으로서의 삶.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자신의 가치를 찾는 삶에서 마음의 편안을 찾는 것이다. 자신에게 상을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스스로를 지적하는 패배의식보다는 자아팽창을 위한 조치 같은 거.
이상세계는 물 건너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공자는 고향의 어린 제자들이 생각났다.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펼치지 못했던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후진을 양성하기로 결심했다.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야겠다. 내 고향의 어린 제자들이 뜻이 크지만 치밀하지 못하고 겉모양이 찬란하게 문채를 이루었으나 일을 재량할 줄 모른다. <공야장편 5-21>
진나라에 머물고 있다가 제자 염구 덕분에 귀국하여 제자 양성과 원로로서 군주나 대부들의 자문에 응하면서 지냈다.
당대의 노나라 실권자인 계강자가 묻는다. 도둑을 없애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자신이 욕심을 버리고 굶주린 현실을 잘 반영하여 보살피면 백성들은 상을 준다 해도 도둑질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실로 남의 눈에 티만 보이고 자기 눈에 티는 보지 못하는 위정자의 모습이다.
계강자가 도둑이 많음을 걱정하여 공자께 묻자 “진실로 그대가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상을 준다고 해도 훔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안연편12-18>
다시 묻는다.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어 도둑질을 하고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법을 어기는 자가 많아 강력하게 통치하는 공포정치를 실행하면 어떨까하는 속마음의 일단을 드러낸다.
계강자가 공자께 정치에 대해 묻기를 “무도한 자를 죽여서 도가 있는 사회로 나아간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대가 정치를 하는데 어찌 살육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대가 선(법과 규정을 준수) 하면 백성들 또한 선하게 될 것입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니 풀은 그 위에 바람이 불면 바람을 따라 쓰러집니다.” <안연편 12-19>
지도자들의 행위가 백성들에게 반면교사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면서 유체이탈식 행동을 하고 있다. 백성들은 법과 규정을 지켜야 하고 지도자는 예외로 두려는 의식과 행동이 문제다.
나이 일흔. 마음가는대로 행동해도 원칙(법도)을 벗어나지 않았다. 식색의 욕구와 세속적 욕망이 사라졌다.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맞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단계’<중용20장>. 의지(사회적 규범)와 도덕률(양심)이 일치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렀다.
가장 아끼는 제자 안회(안연)가 죽었다.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다. 아들 리鯉가 죽었을 때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던 공자가 소리 내어 운다는 것은 제자 한 명을 잃은 슬픔 때문이 아니다. 몸으로 낳은 자식보다는 마음으로 낳은 자식, 유가의 도맥을 이어 이상세계를 실현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가 죽으니 그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연이 죽자, 공자가 목 놓아 슬피 울었다. 제자가 말했다. “선생님 너무 슬프게 울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내가 너무 슬프게 울었다고?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 통곡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서 통곡한단 말인가.” <선진편11-9>
그토록 아끼던 안회의 죽음 앞에 통곡했던 공자도 장례의식과 관련해서는 단호했다. 안회의 아버지 안로가 공자의 수레를 활용하여 외관을 만들자고 요청하지만 수레는 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자신도 대부의 말석에 있으니 끌고 다닐 수레는 필요했다. 아들이 죽었을 때도 외관을 하지 않았는데 형편껏 장례를 치루면 되는 것이지 무슨 형식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장례는 슬퍼하는 것이 최상의 예라고 생각했다.
일흔 하나, 노나라 애공은 나이가 어려 일흔이 넘은 공자한테 묻기가 어려웠던지 공자를 대신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애공이 물었다. “제자들 중에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안회라는 자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에 대한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으며 같은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고 없습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어서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옹야편6-2>
여느 사람 같으면 역량이 좀 부족해도 추천해 줄만도 한데 공자는 선뜻 누구를 추천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은 죽고 없는 안회 외에는 학문적 성취나 인품면에서 별로 추천할 의사가 없다고 아쉬움만 토로하고 있다.
아들도 죽고, 애제자 안회도 죽고 이제 희망도 사라져가고 있다. 대야라는 곳에서 대대적인 수렵행사가 있었는데 기이한 동물이 잡혔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공자에게 물었더니 무의식중에 “기린이다.” 라고 외쳤다. 기린의 출현은 성군의 출현이요, 태평성대의 도래를 의미하는데 기린이 잡혔으니 이제 공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애공14년 봄에 노나라 서쪽의 대야에서 사냥했다. 숙손씨의 수레를 모는 자서상이 기린을 잡았다. 그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이를 정원 관리인에게 건네주었다. 이때 공자가 자세히 살피더니 “기린이다” 고 말했다. 이로 인해 기린을 잡아두게 되었다. <춘추좌전>
일흔 둘, 그의 애제자이자 말동무였던 자로가 죽었다. 공자는 자로가 다혈질이라 사리분별을 하지 않고 행동하기에 자기 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위나라 영공이 죽자 첩(출공)과 괴외(장공) 부자지간에 군주자리를 놓고 전투가 벌어졌다. 아들인 첩이 먼저 군주가 되어 12년차가 되던 해 아버지 괴외가 공회라는 자와 결탁하여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미 권력은 괴외한테 넘어갔는데 자로가 그것도 모르고 덤비다가 죽임을 당했다. 괴외 일당은 자로의 시체로 젓갈을 담았고 이후로 공자는 젓갈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일흔 셋, 기원전 479년(애공 16년) 여름 4월 기축己丑에 “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쓰러지는가! 철인이 사라지는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공자가 죽었다. 애공이 조사를 내렸는데, ‘하늘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구나. 이 노인 한 사람마저 나에게 남겨주지 않다니. 나를 도와 군주 자리에 있게 하지 않았도다. 외로운 나는 병중에 있는 듯하다. 아아! 슬프구나! 공자여! 나는 어찌 할 줄을 모르겠구나!’”라며 한탄했다. 공자세가에 ‘공자는 노나라 수도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묻혔다’고 했는데, 공자는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의 공림에서 잠들어 있다.
그의 삶은 굴곡의 연속이었다. 결손가정의 아이로 자라면서 생존하기위해 비루한 일을 많이 배워야 했고 세계평화의 꿈을 실현하기위해 주유천하의 길에 올랐지만 결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년에는 아들, 애제자가 죽는 슬픔을 겪으면서 <춘추>를 저술하고 후학양성에 힘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하지만 그의 사상과 철학은 끝내 잠들지 않고 면면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