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5패
춘추시대는 노나라의 역사서<춘추>에서 유래된 말이다. 시기적으로는 주나라가 낙읍으로 수도를 옮긴 기원전 770년부터 진晉나라가 한, 위, 조 세 나라로 나누어진 기원전 403년까지 약 370년을 말한다.
전국시대는 유향의<전국책>에서 유래된 말로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403년부터 주나라가 멸망하고 진秦시황제가 천하통일을 이룬 기원전221년까지 약 180년을 말하며 둘을 합하여 춘추전국시대라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기원전 5세기는 철의 발명으로 농업에서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사람보다 훨씬 힘이 센 소와 쟁기를 이용하여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크게 증대되면서 여불위같은 대상인이 등장하고 전쟁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예전 같으면 백성들이 모두 농사에 종사해야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농한기에 징집되어 병력으로서 역할을 했다. 이제 생산성이 증대되어 1/10만 농사에 전념하고 9/10를 전쟁에 동원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아울러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귀족들이 싸우던 전차전이 평민 병사들의 보병전으로 바뀌었다. 위정자들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인접 제후국을 침탈하는 행위가 빈번해졌다.
둘째, 사회질서가 붕괴되는 변동기로 지금까지는 천자-제후-경대부-사-민民으로 이어지는 체계였지만 천자의 힘이 약해지면서 제후들이 득세하고 한편에서는 경대부들이 제후를 넘보았다. 노나라의 경우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의 3환이 국정을 농단하고 제후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기원전 841년 중국 역사상 최초로 주나라 10대 여厲왕이 탄핵되어 천자의 행세를 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가까스로 왕조가 수습하는 듯하다가 12대 유왕이 자살하고 평왕 때 도읍지를 동주로 옮긴 후 주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각 나라의 제후들은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주나라 왕실을 보호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아래 수시로 동맹 또는 연합하여 강력한 힘을 보유했다. 이들은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부차, 월나라 구천으로 춘추5패라고 부른다.

제나라 환공
제나라는 주나라 무왕과 함께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의 건국에 기여한 태공망 여상이 산동성 일대에 세운 나라이다. 환공은 태공망 여상의 12대 손자인 제나라 희공의 셋째 아들로 성은 강, 이름은 소백이다. 아버지 희공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 양공이 어린 나이에 여동생 문강과 정을 통했다. 문강은 나이가 들어 노나라 환공에게 시집갔다. 노환공이 재위 4년째 문강과 제나라를 방문했을 때 양공과 문강 두 오누이가 다시 불륜을 저질렀다. 이 사실이 노환공에게 발각되자 양공이 아들 팽생에게 그를 죽이도록 했다.
아버지 희공은 정사에 무관심했다. 방탕한 아들 양공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조카인 공손무지를 총애했다. 공손무지는 오히려 사냥터에서 양공을 죽여 버리고 제후의 자리에 오른다. 공손무지의 반란으로 양공이 죽자 동생 규는 관중과 소홀을 데리고 노나라로 도망가고 막내 동생인 소백은 포숙아와 기나라로 숨었다. 공손무지의 무례한 행동에 원로인 옹름이 난을 일으켜 제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제후 자리를 놓고 형제간에 전투가 벌어지자 옹름은 규를, 파견 나온 군사 고혜는 소백을 지지했다. 고혜가 기나라에 있는 소백에게 연락하여 조속히 귀국하도록 했다. 상황을 간파한 규의 참모인 관중은 기나라에서 제나라로 들어오는 길목에 군대를 잠복시켜 소백과 포숙아를 기습공격 했다. 관중의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진 소백. 규 일행은 승리했다고 확신하고 있다가 살아난 소백의 회생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형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제후에 자리에 오르니 15대 환공이다.
기원전 679년 무렵에 중원을 호령하게 되었다. 환공이 제후의 자리에 오르는 데는 포숙아가 절대적으로 기여했지만 재상으로 친구인 관중을 추천했다. 추천의 변으로 “제나라 영토만을 다스리는 데는 포숙아 하나로 충분하지만 천하를 다스리려면 관중 같은 능력 있는 자가 필요합니다. 그는 ①백성들에게 너그럽고 ②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지키며 ③백성들의 힘을 규합하는 능력이 있고 ④예법을 알아서 언행에 부끄러움이 없으며 ⑤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는 능력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관중은 재상이 되어 통치의 기본철학을 예의염치四維-백성은 창고가 넘쳐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영화와 치욕을 안다-에 두고 염전개발, 정전법개편 등으로 백성들을 잘 살게 했다. 군사력양성으로 부국강병책을 펼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나라를 융성하게 만들었다. 논어에 그를 칭송하는 내용이 있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서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하여 천하의 질서를 세웠으니, 백성들은 지금까지 그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서 늘어뜨리고 옷자락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통치하에 살고 있을 것이다. 어찌 보통사람들이 작은 신의를 지킨답시고 스스로 목메어 도랑에 빠져 죽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겠느냐?” <헌문편14-17>
제나라 환공은 왕을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으로 주나라 왕실을 보호했다. 천자의 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든지 주나라 왕실을 위협하는 행위와 정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튼튼한 경제력과 막강한 군사력으로 정벌하기 시작했다. 먼저 담나라와 노나라를 정벌했다. 담나라는 과거 환공이 거나라로 망명갈 때 푸대접한 것에 대한 보복이고, 노나라는 형 규와 권력투쟁을 할 때 상대진영에 군사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합리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며 정의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군사지원도 서슴지 않았다. 융戎족과 적狄족이 위나라를 공격해 의공이 죽자 융족과 적족을 물리치고 위나라의 안정을 도모했다. 산융족이 연나라를 공격했을 때는 연나라의 요청에 출병하여 제후 장공을 구해 주었다. 연나라 장공이 국경을 넘어서 환공을 극진히 배웅을 하자 그 지역을 연나라 땅으로 인정해 주었다. 환공의 포용력과 통솔력에 제후들은 모두 머리 조아리며 패자로 인정했다.
공자가 말한다.
“제나라 환공은 정도를 걷고 권모술수를 쓰지 않았다.” <헌문편14-16>
남쪽의 초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인접한 신나라와 수나라를 정벌하고 채나라를 공격하여 애공을 잡아갔고 정나라마저 공격하자 환공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초나라를 정벌-주나라 소왕이 남정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는 사건이 발생하자 초나라 정벌의 명분이 생김-했다. 제나라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려 초나라가 강화조약을 맺었다. 환공은 올바르고 정의로웠으며 기만과 농간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패자로서의 지위는 오래 가지 못했다.
관중과 포숙아가 죽고 귀를 막고 눈을 흐리게 하는 삼귀-환관 수조, 요리사 역아, 위나라 공자 개방-가 국정을 농단했다. 기원전643년에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환공이 죽자 환관인 수조와 요리사 역아가 유언장을 조작-군권은 역아, 정사는 수조가 담당 -하여 장위희의 아들 무궤를 제후자리에 앉혔다. 송나라로 피신했던 태자 소昭가 송나라 양공의 지원 하에 제나라를 공격하여 무궤 일당을 죽이고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환공은 죽은 지 67일이 되어도 장례를 치루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강력한 지위를 자랑하던 제나라도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의 침공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진晉나라 문공
진나라는 산서성 남쪽인 분수지역에 주나라 성왕의 동생 당숙 우가 세운 나라다. 기원전 678년 주나라 왕실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해 혼란스러운 시기에 진나라 무공이 지역을 안정시켰다. 이후 헌공 때 세력을 확장하여 위나라, 괵나라, 우나라를 멸망시키고 기틀을 잡아 중원의 강자가 되었다. 헌공은 정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했고 제나라 환공의 딸인 제강이 아들(신생)을 낳았다. 그러나 신생은 어머니가 일찍 죽어 태자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심한 견제를 받다가 여희 일당-여희의 아들 해제를 태자로 삼으려고 꾀를 씀-의 모함으로 자살했다. 헌공은 이외에도 적족출신의 호희와 사이에 중이, 이오라는 아들을 얻었다. 중이 또한 여희의 모함에 걸려들었다. 위기의 순간에 측근인 호언의 조언으로 포성 땅으로 도망갔다. 중이의 망명 생활은 계속되었다.
망명여정은 적狄나라에서 위나라로 가고 조나라, 정나라 ,초나라 ,진나라를 거쳐 장장 19년간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환대받은 적도, 멸시를 당했던 적도 있었다.
기원전 651년 9월 진나라 헌공이 죽자 내분이 일어났다. 이극과 비정이 해제와 탁자를 죽이고 중이를 제후로 옹립하려고 했다. 중이는 호언의 반대로 자리에 앉지 않고 동생 이오(진목공의 매제)를 추대하니 그가 혜공이다. 혜공은 기원전 647년 가뭄이 들자 진秦나라 목공에게 지원을 요청해 곡식을 받았다. 이듬해 진秦나라에 기근이 들어 지원을 요청하나 혜공이 거절했다. 목공은 화가 치밀어 진晉나라를 공격하고 혜공을 포로로 잡지만 여동생인 백희의 도움으로 풀려나면서 하서 땅을 바치고 아들 어圉를 볼모로 잡아두었다. 기원전 638년 9월 혜공이 죽자 어는 긴급히 귀국하여 군주(회공)가 되었다. 큰아버지인 중이의 존재가 두려워 ‘중이한테 협조한 자는 죽인다.’는 조칙을 내리지만 혼란한 정국에 그는 안정을 찾지 못했다.
결국 진나라 목공의 도움으로 권좌에 오르게 되니 그가 22대 제후가 된 문공(중이)이다. 19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62세에 권력을 잡았다.
문공은 성복전투에서 제나라, 진나라, 송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를 물리쳤다. 최초 전투에서 진나라 군사는 문공이 망명생활 할 때 초나라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90리를 물러났지만 이후 공격하여 6일 만에 박살냈다. 이 전투로 초나라 성왕은 자살했다. 문공은 주나라 양왕을 맞이하면서 천토회맹을 하고 양왕을 위해 궁궐을 짓고 전리품을 주었다. 감사의 뜻으로 후백의 지위에 임명하고 칙서를 내리면서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가 되었다.
진나라 문공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차갑다. 힘으로는 패자가 되었지만 하양 땅에서 회맹할 때 나라 안을 두루 살핀다는 명목으로 천자를 오라고 했다. 예법에 맞지 않기 때문에 정도에 어긋났다고 본 것이다.
공자가 말한다.
“진나라 문공은 권모술수를 쓰고 정도를 걷지 않았다.” <헌문편14-16>
패자의 지위에 올라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는데 호언을 으뜸으로 삼으니 혹자가 말하기를 “성복전투의 공은 선진의 책모였습니다.”고 했다. 문공은 “호언은 신의를 잃지 말라고 말해주었으나 선진은 군대는 이기는 것만으로 으뜸으로 삼는다고 말했소. 내가 그의 말을 따라 승리했지만 이는 한 때의 유리한 말일뿐이오. 호언의 가르침은 만세의 공적이니 어찌 한 때의 유리함이 만세의 공적을 능가할 수 있겠소.”라고 했다. 일시적인 눈앞의 이익보다는 신의를 선택한 것이다.
논공행상에서 개자추의 이름이 빠졌다. 피난시절 식량이 떨어져 문공에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주었던 개자추는 실망하여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문공은 개자추를 찾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으나 타 죽고 말았다. 문공은 탄식하며 그를 추모하기위해 한식寒食을 정하고 그 날 만큼은 불로 지은 음식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절대 강자란 없는 법이다. 오랜 전쟁으로 생산력이 줄어들고 재정이 바닥나면서 제후의 권한이 약해지자 유력한 대부가 나라를 흔들기 시작했다.
기원전 403년 한, 위, 조씨 3명의 대부는 세력을 강화하면서 주나라로부터 제후로 인정받았다. 진나라는 한, 위, 조나라로 나누어지면서 춘추시대가 마감되고 전국시대가 도래했다.
초나라 장왕
초나라는 주나라 문왕의 스승인 죽옹의 증손 옹역이 주나라 성왕으로부터 하사 받아 세운 나라다. 호북성 단양지역에서 한수이남 양자강일대를 장악했다. 기원전 740년 도읍지를 단양에서 영으로 천도했다. 무왕이 나라의 기틀을 다지자 아들 문왕이 중원을 넘보는 강한 나라로 만들고 성왕 때 패자의 자리를 넘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초나라의 세력이 커지자 대외적으로는 진秦나라 목공과 진晉나라 문공의 견제가 심했다. 대내적으로는 후계자를 최초 상신으로 결정하였다가 직으로 번복하면서 상신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성왕은 자살했다.
상신(목왕)은 12년 동안 정치를 잘해 나라가 부강해졌다. 강나라와 욕나라, 진陳나라를 정벌하여 세력을 확장하다가 기원전 614년 노환으로 죽자 아들 려旅가 자리를 이어받으니 그가 장왕이다.
장왕는 3년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고 간신들과 어울렸다. 누구도 간언을 하지 못하게 하며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다. 실권은 영윤 투월초가 쥐고 마음대로 정치를 했다. 보다 못한 오거伍擧는 그가 명군인지 암군인지를 시험하기 위해 묻는다.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는 새가 있다면 이 새는 도대체 무슨 새입니까?” 장왕이 정신을 번쩍 차리고 답하기를 “한 번 날기만 하면 하늘을 치솟아 오를 것이요, 한 번 울기만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오거는 가서 기다리시오” 라고 했다. 이후 장왕은 간신들을 몰아내고 오거를 등용하여 패자로서의 면모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의 지도자로서 아량을 엿볼 수 있는 사례를 보자.
투월초의 난을 진압하고 공로가 큰 신하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장왕은 연회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애첩인 하희에게 돌아가면서 술을 따르도록 했다. 그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지고 주변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틈을 타 한 장수가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 화가 난 하희는 비명을 지르며 추행한 장수의 갓끈을 잡아 당겼다. 장왕께 갓끈을 보여주며 “여기 갓끈이 없는 자가 범인이니 잡아 달라”고 했다. 애첩의 말을 들은 장왕은 “오늘은 즐거운 자리니 모두 갓끈纓을 끊고絶 마음껏 즐겨라”고 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초나라가 진晉나라와 전투를 하는데 한 장수가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하게 싸워 승리했다. 장왕은 그 장수를 불러서 연유를 물으니 “저는 3년 전 연회자리에서 애첩인 하희에게 갓끈을 뜯긴 사람입니다. 왕께서 저를 용서해 주었기에 살았고 이후부터 저의 목숨은 왕의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 사건을 일러 절영지회絶纓之會라고 한다.
투월초의 반란을 진압한 장왕은 위애렵을 영윤으로 하여 군대를 정비하고 수로개설, 황무지 개간 등 부국강병을 도모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흉년과 질병으로 백성들은 어려움을 겪었고 설상가상으로 융족이 초나라를 침범하여 도성까지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아버지 목왕 때 원한으로 용나라가 만蠻족과 연합하여 공격하였고 소국인 군나라도 침범했다. 군사인 사숙의 지혜로 군나라는 도망갔고 용나라는 물리쳤다. 세력이 막강해지고 위세가 등등해진 장왕은 중원의 패자를 노리고 기원전 608년 진晉나라를 점령하고 진陳나라와 송나라를 공격했다.
장왕은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융족을 정벌하기 위해 육혼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집권초기의 수모를 복수했다. 주나라 땅인 낙수유역에서 관병식을 하고 위세를 떨치다 중원을 장악한지 6년(기원전 591년)만에 사망했다.
오나라 부차
고공단보의 큰 아들(태백)의 19대 후손인 수몽이 죽고 제번이 제후의 자리에 오르면서 오나라는 국력이 신장되었다. 제번이 집권하면서 국가형태를 유지했다. 뒤를 이은 여제는 남쪽의 월나라가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침공하여 신하들을 포로로 잡고 발 뒷꿈치를 자르는 형벌을 가했다. 하지만 월나라 포로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연회자리에서 여제를 칼로 찔러 죽였다. 이어서 여말이 제후의 자리에 오르나 4년 후 죽었다. 다음은 계찰이 자리를 물려받아야 하나 사양하고 여말의 아들 요를 추대했다. 광(합려)은 요왕을 살해하고 기원전 515년 삼촌인 계찰의 도움으로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합려는 즉위 3년 만에 육나라와 첨나라를 정벌하였고 초나라 대군과 예장에서 격돌하여 거소지역을 함락했다. 기원전 506년 겨울, 오자서와 백비, 손무를 내세워 초나라를 공격하여 3번이나 승리하였다. 즉위 9년 만에 초나라를 정벌했다. 장화대에서 연회를 베풀고 전투에 공이 많은 장수들을 치하했다. 이 때 오자서가 합려에게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서 구리로 만든 구절편으로 삼백 번의 채찍질하고 배를 밟고 눈을 후벼 파고는 시신을 벌판에 버리는 굴묘편시掘墓鞭屍의 복수를 하고 싶다고 건의하자 받아들였다.
월나라 구천
월나라는 주나라 시조(고공단보)의 둘째 아들인 중옹이 세운 나라다. 수십 개의 부족국가로 흩어져 세력의 구심점이 없었으나 윤상이 부족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워 나갔다.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이 왕이 되자 합려가 월나라를 공격했다. 지략가 범려의 활약으로 합려는 독화살을 맞고 죽으면서 아들 부차에게 “너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구천이다. 원수를 잊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로서 부차와 오자서의 오나라와 구천과 범려의 월나라의 길고 긴 싸움은 시작되었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섶薪 위에서 누워臥 잠을 자면서 구천을 향한 복수의지를 불태웠다. 합려가 죽은 지 3년째인 기원전 494년 오나라는 다시 월나라를 공격했다. 범려가 화친을 청하면서 때를 기다리도록 건의했다. 구천이 이를 묵살하고 강소성에 있는 부초산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가 대패하고 회계산에서 항복했다.
구천은 항복의 표시로 부차의 부하가 되고, 그의 아내는 부차의 종이 되겠다는 약속을 전하자 백비는 관용을, 오자서는 죽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결과는 백비의 건의를 받아들여 구천을 용서하고 오나라에 머물게 했다. 이 선택은 나중에 오나라의 멸망과 부차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구천은 회계산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쓸개膽의 맛嘗을 보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오왕 부차는 섶 위에서 잠을 자고 월왕 구천은 쓸개 맛을 보면서 치욕을 잊지 않고 복수를 다짐하였는데 이를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한다.
구천은 3년 동안 치욕을 참으면서 버티다 오왕 부차가 건강에 이상이 생겨 병석에 눕자 그의 똥을 맛보고 병세가 좋아질 것이라고 아첨성 발언을 했다. 부차는 구천이 변심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오나라에서 고소대라는 궁궐을 짓자 구천은 아름다리 나무를 바치며 굳게 믿게 했다. 내부적으로는 군량미를 비축하면서 복수의 시간을 기다리며 부차에게 서시라는 미인을 바쳐 정사에 소홀토록 유도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오나라 부차가 제나라를 공격하자 신 땅에서 군대를 재정비하여 기회를 엿보던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오나라 군대는 혼비백산했지만 구천은 더 이상의 공격 하지 않고 그대로 퇴각했다. 이 모두가 범려의 계책에 따른 것이다. 3년 뒤, 구천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의 수도를 포위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부차는 수치를 무릅쓰고 월나라에 화의를 요청했다. 범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하면서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며 얼굴에 보자기를 씌어 달라고 했다. 구천이 패업을 달성하자 공을 세운 범려는 갑자기 구천에게 작별을 청했다.
구천이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범려와 문종의 역할이 컸다. 논공행상을 하기 전에 범려가 문종에게 “구천은 당신을 죽일 것이니 떠나라”고 조언했다. 문종이 떠나지 않자 범려는 문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새를 잡으면 활은 거두어 창고로 가고 토끼를 잡은 후에는 사냥개는 삶아 먹는다. 적국이 멸망하면 유능한 신하는 버려져 죽게 된다. 구천의 관상이 긴 목에 까마귀 같은 입을 가졌으며 매의 눈과 탐욕스런 걸음걸이를 한다. 이런 사람은 어려움과 환난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을 같이 나눌 수 없다.<춘추좌전>
아니나 다를까 구천은 문종에게 오나라 정벌 때 가르쳐 준 7가지 술책 가운데 3가지 술책만 사용하였는데 4가지 술책은 지하에서 사용하라며 자결토록 했다.
구천의 곁을 떠나 제나라로 간 범려는 치이자피鴟夷子皮로 이름을 바꾸고 바닷가에서 농사지으며 큰 재산을 모았다. 제나라에서 범려를 재상으로 초대하지만 더 이상 관직에 대한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생각에 사양했다. 전 재산을 나눠주고 도陶나라로 떠났다. 이름을 도주공陶朱公으로 바꾸고 유통업을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Tip 술은 양끝 마셔라, 그러나~~
| 공자의 술에 대한 가르침은 “술을 마시지 마라”가 아니라 “알아서 책임지라”는 것이다 . “술은 마음대로 마셔라, 그러나 어지러움에 미쳐서는 안 된다.-유주무량불급난有酒無量不及亂- ”<향당편10-8> 개인별 주량을 고려하여 양껏 마시되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는 최종상태를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신체조건, 그 날의 환경과 분위기를 고려한 주법을 가르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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