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수필

합리화vs합리적

벽암거사 2025. 8. 21. 00:45

DMZ 평화누리길, 소이산에 올라 철원평야를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는 눈으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넓고, 조상들의 삶이 배어 있는 터전이자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줄 땅이었다. 한쪽에는 반듯하게 정리된 논두렁이, 다른 한쪽에는 비뚤비뚤한 논두렁이 나란히 있었다. 반듯함과 비뚤함 사이, 그 틈새에 조상들의 땀과 피가 서려 있으리라…….

 

오늘은 14번째 구간이었다. 계획대로라면 대위리 검문소에서 이길 검문소, 도창 검문소까지 이어 걸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계획과 달랐다. 이길 검문소에서 도창 검문소 구간은 걸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우리는 길을 바꾸었다. 백마고지 전투전적비 앞에서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영령들께 헌화하고 묵념하며 오늘의 여정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던 철원평야는 조상들의 젖줄이자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였다. 이곳에서 중공군과 한국군은 12차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중공군 1만 명과 국군 3,500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71년이 지난 지금, 평야에는 포탄 연기나 피비린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고요와 평화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전략적 선택을 고민하고, 군을 지휘하는 장군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결단을 내린다. 선택과 결단의 순간, 적과 아군 모두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을 선점하려 한다. 이를 군사적 용어로 감제(瞰制)고지라고 한다. 오늘 우리가 헌화하고 묵념한 백마고지는 바로 그 감제고지였다. 그곳은 1만 명의 목숨보다 더 귀한 존재였다.

 

70여 년 전, 지도자들은 전쟁과 승리에 몰두하며 인간의 생명을 초개처럼 여겼다. 생명 존중과 인류애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행동은 과연 합리적이었을까? 아마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믿으며 행동을 합리화했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보면 종종 ‘합리화’를 ‘합리적’으로 포장한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한 발짝 물러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왜 그렇게 아등바등하는지 그 이유가 보인다.

마라톤에 익숙한 나에게, 평화누리길을 걷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조금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두루미 떼를 바라보고, 갈라진 논바닥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때로는 바지에 흙탕물이 튀고, 보초서에서 초병에게 낭패를 당하기도 하지만, 걷고 또 걷는다.

 

합리적인 사람과 합리화에 익숙한 사람을 떠올려 본다. 개를 산책시키는 주인이 행인을 위해 길을 열어줄 때, 개의 목줄만 잡고 자신의 몸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합리화에 익숙한 사람이다. 반대로 개를 그대로 두고 자신의 몸으로 개의 입을 막아 행인의 길을 열어주는 사람은 합리적인 사람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행인이 앞을 막으면, 기계음으로 “따르릉~~” 소리를 내며 그냥 지나가는 사람과, 속도를 줄이고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할 때 낮은 목소리로 “따르릉” 하고 알리는 사람의 차이와 같다. 합리적인 사람은 상황에 맞춰 배려하며 선택한다.

 

시선을 안으로 돌린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나의 전략적 포지션, 내 삶의 감제고지는 어디쯤일까? 나는 배려하며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현실을 나의 잣대로 맞추며 합리화에 익숙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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